<아놀드 리 선생의 뿌리찾기> 이기훈 "아니, 유전자 감식법으로도 제 선친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우주 정거장 최초의 한국인 아놀드 리씨는 큰 상심에 빠졌다. 화상통신에 나타난 족보탐색 회사의 정과장의 말에 따르면, 21세기 최첨단 정보시스템으로도 잃어버린 부모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놀드 리씨는 우주정거장 아래에 난 창으로 지구를 내려다 보았다. 동북아시아의 자그마한 한반도는 막 저녁을 맞고 있었다. 저 작은 지구 한모퉁이에 계실 부모님을 어이하여 찾지 못한단 말인가. 아놀드 리씨는 실은 한국 우주진흥당 총재였다. 그는 21세기 통일 후 새로이 정치, 경제적 난관에 봉착한 고국을 우주로 이끌기 위해 몸소 우주정거장 한국영역으로 이민을 왔었다. 어릴적 노르웨이로 입양되었다가 다시 한국으로 귀국해서 정치적으로 성공을 이룬 것만으로도 국민적 관심을 끌던 아놀드 리씨는, 우주개발에 보수적인 정부에 대항하다가 40의 나이에 다시 조국의 미래를 위해 솔선해서 우주로의 이민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아놀드 리씨를 괴롭힌 것은 정치적 입지나, 우주정거장에서의 정착문제가 아니었다. 실은 한국정부에서 통일 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호적조사를 실시한다는 간단한 전문을 보냈는데, 그 세부 조항중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던 것이다. '특별조항 제 3항: 오랜 남북분단이나 기타 경우에 의한 실향민의 경우, 새로이 현 거주지를 기준으로 본관(本貫)을 새로이 창설하는 것을 적극 장려함' 말하자면 기존의 족보가 없이 떠돌던 사람은 되도록이면 현재 거주지를 기준으로 새로운 본적과 성을 등록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놀드 리씨는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는 동료들이 고향이나 조상을 물으면 편의상 '고향은 한반도요, 조상은 한민족'이라고 선문답으로 떠넘겼지만 내심 개운치 않았거니와, 같이 일하는 영국인 브랜던이 평소 자신이 귀족가문이고 으시대던 것도 영 못마땅했었다. 그런데 난감한 것이 생각을 해보니, 자신의 입양지 이름을 따서 성을 '노르웨이 이(李)'씨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현주소를 기준으로 '우주정거장 이'씨라고 붙일 수는 더더욱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새삼 자신의 부모를 찾을 결심을 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픈 과거였기에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미뤄온 일이기도 했다. "이것 보시오. 정 과장. 정말 무슨 방법이 없겠소? 비용은 문제가 아니오. 어떻게 좀 해보십시다." 아놀드 리씨는 애꿎은 족보탐색 회사의 정 과장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네, 하지만, 이거 어쩝니까. 아무리 최첨단 유전자 감식법이라고는 해도, 온 국민의 유전자가 모두 등록된 것도 아니고 2030년 이전에 사망한 사람들의 유전정보는 기록이 안되어 있다는 걸 잘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제 신세에 이제와서 새삼 부모를 찾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사실.. " 지구쪽 모니터에 비친 아놀드 리의 모습은 더욱 처연해 보였던지 정 과장도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듯이 정 과장이 얘기를 꺼냈다. "저.., 선생님. 혹시 문헌검색에 근거한 친족추적 써비스를 신청해보시는게 어떨지요? 끝내 친족을 찾지 못한 분들을 위한 써비스라서 좀 고가이기는 합니다만, 당사자의 정서분석및 저술을 토대로 현재 알려진 모든 문헌을 검색해서 친족일 가능성이 높은 유명인을 찾아내는 겁니다. 뭐, 그 유명인이 꼭 조상이란 법은 없지만, 그래도 새로 본관(本貫)을 만드시는데 참고가 되실듯해서.." 그래서 아놀드 리 씨는 6개월치의 보수를 몽땅 가불해서 문헌 어쩌구 하는 써비스를 신청했다. 어찌보면 그것도 허망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지구에서 긴급송신으로 긴 문서가 우주기지의 아놀드 리씨 앞으로 전송되었다. 보낸 이는 '한국 족보탐색 회사 신의주 지부, 정과장'으로 되어 있었다. 선생님이 저술하신 모든 책들과 문헌을 입력해서 근래 300년 내의 모든 박물관, 도서관내 국한문 자료와 비교작업을 한 결과, 아래와 같은 문헌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아래의 대상자는 선생님의 조상이거나 혈연관계일 확률이 83%로 나타나서 본 회사 창립 이래로 문헌써비스 결과로는 최고의 확률을 기록한 바... < 대상인 : 이 득공(得公) (18?? ~ ? ) 실학자 인생행로 : 전남 산천 지방에서 태어나 고아로 떠돌다가 중국상인에 의해 입양되었다가 프랑스 남부에 노예로 팔려감. 병인양요때 프랑스 군함에 동승하였다가 포로로 잡혀 귀국. 후일,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비판하다가 갑오경장에 참여한 이 후 말년을 다시 해외에서 보냄. - 아놀드 리씨와의 인생행로의 유사점 92% 혈족 가능성 시사 문헌내용 : 이득공: "..시절이 난(亂)하고 국(國)이 쇄하여 민(民)이 어려우니, 과감히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여 신(新)천지에 기상을 떨치는 것이.." 아놀드 리: "..현재 새로이 어려움에 처한 우리 한민족의 활로야 말로 드넓은 우주를 개척하는 것이니.... " - 아놀드 리씨와의 사고방식및 진취성의 유사성 78% ......... > 아놀드 리씨에게도 이제 조상이 생기게 되었다. 몇 %의 확률은 중요한게 아니었다. 민족의 시련기에 파란많은 일생을 보낸 이득공 선생은 어느새 아놀드 리씨의 깊고도 튼튼한 뿌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구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우주정거장 아래의 한반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禪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