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화가 그리워질때. - 이기훈 "정말 안가거에요?"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서 은아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바구니에 사과와 감자 그리고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된 참외같은 여름과일들을 가득 담은 모습은 마치 들판으로 소풍을 가는 아가씨의 모습이다. 어찌 종말을 맞이한 이 시각에도 그녀는 저토록 아름다운 것일까. "다들 떠나는데 왜 혼자만 남으려는 거죠? 깨어나면 모두 사막이 되어있을텐데요. 도대체 뭘 어쩌려는 거에요." 은아가 안타깝다는 듯 다시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 글쎄, 나는 이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걸 지켜보고 싶은거야. 밀림이나 녹지로 숨어들어서 고작 사라지는 라이터나 안경 따위를 쳐다보고 있을 순 없어." " 다시 깨어나서 '선지자'라도 되려는 건가요? 하지만, 그 건 심리학적으로 위험한 일인데.. 혼자 있다간 '끝'이 채 오기도 전에 당신은 자살하려 들지도 몰라요." 은아의 걱정스런 눈빛이 갑자기 차분해졌다. 아. 이 것은 더 불안한데. 언젠가 극지의 빙하지대로 떠나려는 참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말리다가는 결국 저런 눈빛을 보인적이 있었다. 그리고다음날 나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러면, 저도 남겠어요." 아. 결국 은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끝의 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은아와 나, 그리고 몇몇 이 도시에 애착을 못버린 사람들을 제외한 모두는 밀림으로 떠나갔다. 게중에는 깨어날 때, 춥지나 않을까 해서 담요나 코트를 가져가는 아낙네들도 있었지만, 어짜피 인공물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있다고 경전에는 적혀 있다. 그러고 보면, 은아처럼 싱싱한 과일과 감자같은 걸 싸들고 있는 이들이 그나마 현명한 편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지자들도 그들이 깨어났을때의 상황을 모두 기억하는 이는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뭏든 은아가 남겠다고 고집을 부리게 되다니. 모두들 떠난다고, 북쪽 초원으로 마중을 나간 자체가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 옆집 아주머니가 어짜피 프로펠러가 둘 밖에 안달린 경비행기에는 실지도 못할 호박을 12개나 실어다 달라는 바람에 초원의 비행장까지 나갔던 것인데, 실수로 은아를 만나다니.. 결국, 그녀의 고집에 못이겨 - 사랑하니까! - 세발 디젤 자동차 옆에다 은아를 태웠다. 집으로 오는 길에 라디오를 켰다. 이미 며칠 전부터 24시간 음악방송만 계속되고 있었지만, 간간히 녹음방송이나 혹은 나처럼 고집이 센 아나운서들이 침몰하는 배를 지키는 선장이나 된 것처럼 사뭇 비장하게 대사를 넣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막 '운명'을 틀고서 '경전'을 읽어대는 이사람은 독실한 종교 탓인지 그래도 침착한 편이었다. "여러분, 이 시각까지 녹지대로 피신하지 않고 본 EMC 방송 '과거의 소리' 코너에 변함없이 귀기울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전에 들으신 곡은 베르빈 작곡의 바이올린 독주곡 2번 운명이었습니다. 한동안 2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성악곡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최근에 오지에 숨어살던 한 노파 선지자가 결정적으로 3악장의 멜로디와 날카로운 소리를 떠올려냄으로써 베르빈이라는 작가의 걸작이 전 3악장의 찰현악기 바이얼린 곡이었음이 알려진 것입니다. ..." " 그런데, '끝'은 낯에 올까,아니면 밤에 오려나.." 은아가 긴머리칼로 내 뺨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 글쎄, 그 '끝의 바람'이 언제 불어 올지야 알 수없지. 하지만, 아마 저녁무렵일거야. " "왜 그래요?" " 그건, 이제껏의 선지자들이 흔적이나마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항상 은은한 주홍빛으로 채색되어 왔으니까. 그 건 아마도 노을빛일꺼야." "우리도 그 걸 볼 수 있겠죠?" "글쎄. 봐도 다시 깨어날 때는 아마 잊어버릴 거야. 혹시, 우리 은아가 깨어나서 그 아름다운 마지막 노을을 기억해내면 선지자로 숭앙받겠지. 하하." 하늘가에 태양 반대편에 떠있는 '검은 달'은 점차 완전한 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그 탓인지 라디오 전파가 계속해서 교란되고 있었다. 많은 선지자들의 과거의 기억이 정확히들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유독 '검은달'의 출현 후 100일 후에 '끝'이 왔다는 것만은 이상스레 일치하고 있었다. "...청취자 여러분, '경전' 7장 3절 대 선지자 살롬의 기억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 과거에 위대한 자 루서가 말했으니, 인간은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라 했도다. 이 말은 모두 다가올 '끝'을 이르는 말이니 그 때에 이르러 우리는 모두 문명의 힘겨운 기억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로다.- 아. 여러분. 이제 우리가 그 때를 맞이했군요. 그러나, 모두들 안심하십시오. 어느 선지자도 고통을 기억하는 이는 없었으며 모두들 편안한 잠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두려워 하지 마십시요. 다만, 오늘 '끝'이 닥칠때에 7,8층이나 되는 고층건물에서는 모두들 나오셔서 되도록이면 단층의 목조건물에 계시거나, 혹시 '끝'이 춥지 않은 낮이나 저녁무렵에 온다면, 종말청에서는 그렇게 예언 했습니다만, 모두들 넓은 광장 근처로 나와계시기 바랍니다. 모든 인공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니, 공중에 떠있기를 바라시는 분은 없겠죠. 하하. 그럼 분위기를 바꿔서 18세기 영국 가수 존 덴버가 작곡한 yesterday를 선지자 갤런의 기억판으로 들어보시겠습니다. 노래에는 지미 터퍼입니다. 'yesterday. all your travelling so far away..' " 거리는 한산해서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만 비교적 번화했던 이 도시를 훑어지나가고 있다. 모두들 간신히 기억들이 회복되어서 '경전'을 완성해가던 즈음, 즉 지난번 '끝' 이후의 한 200년 후쯤에 나는 이 모든 신의 섭리를 밤새워 파헤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봤자, 남아있는 인공물 하나 없이 세계에 퍼져 있거나 은거한 몇 몇 선지자들의 기억을 조합해가는 일에 한정될 수 밖에 없었지만. 거의 인류의 희망으로 추앙받는 대선지자 바디간에 의하면 1500년 전에 처음 시작된 그 '끝'이래로 우리는 죽지도, 늙지도 않고 다만 300년 마다 반복되는 '끝'에서 깨어나 문명을 복구하다가 다시 그 '끝'을 맞는 허무한 순환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끝'을 보낸 신의 사자는 '반물질파'라고 했다. 선지자들이 정신적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곳곳의 오지에 은거하지만 않았어도 좀 더 완정한 '경전'이 되었을 것을.. " 나는 아뭏든 깨어났을때 당신곁에 있고 싶어요. 혹시, 난폭해져서 저를 때리시지는 않겠죠?" 은아가 생각에 잠긴 나를 질투라도 하는 양 물어본다. " 글쎄, '경전'에 따르면 원시상태로 까지 되돌아가서 깨어 나지는 않는다니까. 아뭏든 어떤 수준으로 깨어나도 난 은아를 사랑할거야." " 흠. 믿을 수 없어요. 아마 깨어나서 다른 여자가 있으면 야만스럽게 킁킁거리며 그리로 갈걸요." " 하하. 그러면 내 목에 철사줄이라도 매놓던지. 나중에 깨어나서 '자 착한 원숭이..' 하게." " 에게. 철사줄도 사라지게 돼있잖아요. 어디 단단한 덩쿨이라도 구해서.., 어머.말도 안돼." " 뭐가 말이야?" "그러면.. 깨어날때 우리 옷도.. 없어지는 거 아녜요? 어머나 세상에.." "허허. 걱정하고는.. 내가 세련된 나뭇잎 몇 장이라도 구해다 줄께." 드디어 '끝'이 다가오고 있다. 정말 어느때다도 노을은 아름다웠고, 주위의 탁자나 오두막집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 것은 신기하게도 어두워진 탓에 잘 안보이는 것이 아니라, 점점 무채색으로 변하가는 듯하더니 투명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것은 모퉁이부터 스르르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듯도 했다. 다만 가루가 허공중에서 노을 빛에 녹아버리듯 형체가 사라진다는 것만 차이가 있지만. 모두들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싶다. 은아는 바구니 가득 사과를 담아 놓고는 나뭇잎도 잔뜩 갖다 놓았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은아가 가져다 놓은 사과와 감자가 '끝'이 지나간 후 황량한 이 벌판에 우리가 지탱해야할 최후의 양식이 될 것이다. 하기는 1500년 전 이후로 우리는 특별히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고, 늙지도 않지만, 아뭏든 굶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될테니까. 나는 상상을 해본다. 밀림이나 녹지에는 수십마리의 원숭이 인간들이 서로 싸우고 나무위를 오르내리고 있겠지만, 그 들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질서를 찾을 것이다. 일주일 쯤 지나면 매듭을 만든 유인원과 불을 피운 유인원이 생겨날 것이고 채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청동기,철기시대를 거치겠지. 한 50년 쯤이 지나면 예전의 기억이 빨리 회복되거나 생생한 일부 선지자를 중심으로 종교도 생겨 날 것이고 150년 쯤되면 수십년의 지루한 중세와 르네상스, 냉전시대등을 모두 기억해내고 재생해 가면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한 10년을 남겨두고 '반물질파'와 '우주 식민지행성 탐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의 재생이 뒷받침 되지 않는 '창의성'에 바탕을 둔 연구성과가 10년안에 나올 수 있을까. 한 수 십번쯤 더 '끝'이 지나가면 어쩌면 인류는 반물질파가 지나가지 않는 행성을 찾아 나서기도 할텐데, 진화의 역풍이 사라지면 생명도 다시 유한해질 수도 있을 터이니, 그 때쯤해서 인류는 큰 고민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 때쯤이면 진화가 그리워지기도 할 것이다. 禪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