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감시원 Fire Watch 코니 윌리스(Connie Willis) 지음 이 기훈 옮김 역사는 시간을 초월해 왔다. 그 외엔 단지 영원만이 시간을 이길 뿐이다. - 월터 롤리경 - 9월 20일 화재 감시원들의 추모비를 나는 제일 처음 찾아가 보았다. 물론 추모비는 거기에 없었다. 추모비는 1951년에 월터 매튜스 대사제가 그 유명한 연설을 한 뒤 기증한 것인데, 지금은 아직 1940년인 까닭 이다. 그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도움이 되지 않을 까 싶어 어제 화재 감시원 추모비를 보러 갔던 것이다. 부질 없는 짓 이었다. <대공습> {{ 이차대전 중 1940-41년의 런던 대공습}} 하의 런던에 관한 속성 강의를 들었거나, 시간 여 유가 좀 더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쪽도 내겐 해당 사항이 없었 다. "시간 여행이라는 건 지하철 타는 것처럼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닐세. 바솔로뮤 군." 존경해 마지 않는 던워디 선생이 골동품 안경 너머로 눈을 껌벅거 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20세기로 가든지, 그게 싫으면 실습을 포기하던지 알아서 하게 나." "하지만, 전 준비가 안되었습니다. 보세요. 세인트 폴 {{ St. Paul, 미국 미네소타주의 주도}}로 갈 줄 알고 시간 여행 준비를 하는 데 무려 4년이나 걸렸어요. 세인트 폴 말입니다. 세인트 폴 성당 {{ St. Paul's, 런던에 있는 유명한 성당. 이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공습으로 생긴 화재로 거의 소실되었다가 후에 다시 복구됨.}}이 아니라구요. 이틀 만에 <대공습>하의 런던에 실습갈 준비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할 수 있고 말고." 던워디 선생이 말했다. 면담은 그걸로 끝이었다. "단, 이틀이라구!" 나는 룸메이트인 키브린에게 소리쳤다. "이게 다, 어떤 컴퓨터가 's'를 덧붙인 탓이야. 그 잘난 던워디 선생은 내 항변에 눈도 깜짝하지 않더라구. '시간 여행은 지하철 타 는 것과는 다르네. 젊은이.' 요러잖아. '준비를 하게나. 모레 떠나기 로 되어 있으니까.' 그 작자는 완전히 무능해." "아니, 그렇지 않아. 던워디 교수님은 그 방면에선 최고야. 세인 트 폴 성당에 관해 책도 썼는걸. 그분 말씀을 듣는 게 좋을 거야." 하고 키브린이 말했다. 적어도 키브린은 내게 동정적일 거라고 생각 했었는데. 자기 실습 시대가 15세기에서 14세기로 바뀌었을 때 키브린은 거의 히스테리를 일으켰었다. 게다가 어디 14세기나 15세기가 제대로 된 실습 자격이 나 있나? 당시의 질병을 고려한다쳐도 위험 등급 5 이상은 못 되는 데. 그런데 <대공습>하의 런던은 위험 등급이 8이고, 그 중에서도 세 인트 폴 성당은, 맙소사 그 자체로 위험 등급 10이나 되는데 말이다. "던워디 선생을 다시 만나봐야할까?" "응." "만나서는 어쩌라구? 겨우 이틀 남았어. 난 당시의 화폐도, 언어 도, 역사도 몰라. 제기랄, 아는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던워디 교수는 훌륭한 분이야. 되도록이면 그분 말씀을 듣는게 좋다고 생각해." 하고 키브린이 말했다. 착하고, 친애해 마지 않는 키브린. 언제나, 남의 말은 다 좋다고 그러지. 이게 다 그 훌륭하신 양반 덕분이야. 있지도 않은 추모비나 찾아 다니다가는, 또 이제 나무로 턱 바쳐놓은 성당 서쪽문안에 이런 시골 뜨기 차림으로 멍청히 서있어야 하다니. 최대한으로 나를 무방비 상 태로 만들어 실습을 보냈다구. 성당 안은 어두워서 몇 미터 이상은 잘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에 는 어슴프레 빛나는 촛불이 있었고, 좀 더 가까이서 흐릿한 흰색 물 체가 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성당지기가 아니면 대사제일 것 이다. 나는 대사제를 만나면 건네 줄 요량으로, 웨일즈의 신부인 삼 촌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가짜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마이크로 필 름 카드로 된 <역사 보충판 옥스포드 영어 사전>이 무사히 잘 있나 뒷주머니를 두드려 보았다. 보들린 장서각 {{ 옥스포드 대학에 있는 유럽 최초로 설립된 공공 도서관 }} 에서 몰래 빼내 온 물건 이었다. 대화중에 모르는 고어가 튀어나온다고 해서 바로 사전을 찾 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운좋게 아는 척 넘길 수만 있다면, 나중에 뜻을 찾아 볼 수는 있다. "당신, 에이아르피(ayarpee)서 왔소?" 남자가 물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인듯 했다. 그러나, 키가 머리하나 정도 나보다 작았고, 많이 야윈 편이었다. 마치 금욕 생활을 하는 수도사 같은 모 습이었다. 그를 보니 키브린 생각이 났다. 흰색으로 보인건 남자의 옷이 아니라, 품에 안고 있는 다른 그 무엇이었다. 과거로 날아온 상 황만 아니었다면 그걸 그냥 베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대로 준비만 할 수 있었어도 에이아르피란 말 정도는 쉽게 알아 들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껏 준(準)지중해권 라틴어나 유태인 관습 만 공부해오다가 난데없이 코크니 {{ 런던 사투리 }} 나 공습상황 지침 같은 걸 새로 배울 시간은 전혀 없었다. 준비 기간이 단 이틀 뿐인 데다가, 그 잘 난 던워디 선생은 에이아르피이가 무언지 가르쳐 주기는 커녕, 역사 가의 신성한 의무가 어쩌니 저쩌니 설교만 했었다. "에이아르피서 왔냔 말요." 남자가 대답을 재촉했다. 이 시대에는 웨일즈가 외국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마이크로 사전을 꺼내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1940년의 과거 에 마이크로 필름이 있었을리 없다. 에이아르피이. 아마도 화재 감시 원들의 별칭이거나, 뭐 그런 류의 어떤 것이겠지. 그렇다면 '아니오' 라고 충동적으로 말하는 건 별로 현명한 일이 못 될 것이다. "아니오." 말이 생각을 앞질러 나와버렸다. 그러자 남자는 갑자기 내 곁을 쑥 지나가더니 문 밖을 내다보았 다. "제기랄." 그가 내 쪽으로 돌아오며 말했다. "도대체 그 사람들 어디 있는 거야? 게으른 부르조아 타르트 같은 자식들!" 그 남자는 이상한 말을 너무 많이 지껄여서 눈치로 뜻을 때려잡기 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는 마치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 듯 의심스런 눈초리로 날 훑어보았다. "성당은 문닫았습니다." 그가 툭 말을 내뱉었다. 나는 편지를 내보이며 얘기를 꺼냈다. "저는 바솔로뮤라고 합니다. 매튜스 대사제를 뵐 수 있을까요?" 남자는 게으른 부르조아 타르트란 사람들이 오면 들고 있는 흰 꾸 러미로 혼내주려는 듯, 문 밖을 계속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남자는 내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마치 관광 안내원 처럼 말을 했다. "이리로 오시죠." 남자는 어두컴컴한 복도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는 오른쪽편에 있는 중앙 본당의 남쪽 복도를 따라 갔다. 캄캄 한 와중에도 그는 쉴새없이 지껄이며 거침없이 걸어갔다. 성당 평면 도를 암기해 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어둠속을 걸어 헤매는 기막힌 상황에 나는 자제심을 잃고 서쪽 문 밖의 <세인 트 존의 숲>으로 달아나 버렸을 것이다. 내가 있는 위치를 아는 것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헌트 {{ Hunt,영국의 화가 1827-1910 }} 가 그린 <세상의 빛> - 예수가 등불을 들고 있는 그림 - 이 걸려 있는 26번 구역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너무 어두워서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예수가 들고 있는 그 등불을 우리가 쓸 수 있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성당지기는 여전히 떠들어 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우리 성당을 그 망할 놈의 사보이 호텔로 만들어 달라는 것도 아 냐! 고작 간이 침대 몇개 신청한 건데. 차라리 넬슨 제독의 팔자가 더 좋다구. 그 양반은 최소한 베개는 베고 무덤에 누워 있잖아." 남자는 어둠 속에서 흰 꾸러미를 횃불처럼 휘둘러댔다. 흰 꾸러미 는 결국 베개였던 것이다. "간이침대 신청한 지가 2주도 더 되었는 데, 아직도 트라팔가에서 죽은 장군들 묘비 곁에 누워 자야 하다니. 이게 다 그 암캐들이 우리 는 지옥에다 빠뜨려 두고 빅토리아궁의 보초병들하고, 잎담배 {{ tea, 영국 속어로 마리화나 }} 나 피 우면서 그 짓거리를 하고 다니기 때문이야!" 남자는 자기가 터뜨리는 분통에 내가 동조해 주길 바라는 것 같지 도 않았다. 그것이 내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남자의 말을 세 마 디에 하나 정도 밖에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쿵쿵거리며 을씨년스런 제단의 촛불이 보이는 구역을 지났 고, 시커먼 구멍이 뚫린 듯한 장소에서 다시 멈춰 섰다. 25번 구역. <속삭임의 회랑>과 <돔> 그리고 서고(대중에게는 공개되지 않는)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계단을 올라서 넓은 홀로 내려가서는 중세 풍의 문 앞에서 다시 멈췄다. 그리고 노크를 했다. "나는 에이아르피이에서 누가 오나 가봐야 겠군요."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안나가보면 아마 간이침대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다 갖다놓 을 걸요. 사제님께 다시 그 사람들한테 전화하시라고 전해 주십쇼. 아시겠죠?" 그리고는, 여전히 베개를 방패처럼 품에 꼭 안은 채 돌층계로 내 려가 버렸다. 그가 노크를 했었지만 대사제는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 을 것이 분명했다. 그 문은 한 30 센티 두께는 되어 보이는 견고한 나무문이었다. 결국 노크를 다시 해야만 했다. 좋아, 까짓것, 어차피 치뤄야 할 일인걸. 하지만, 눈 딱감고 저질 러 버리면 어느새 휙 지나가기는 해도, "자, 한다!" 하고 막상 행동 에 뛰어드는게 그리 맘처럼 쉽지는 않은 법이다. 그래서 나는 역사학 부와 그 잘난 던워디 선생, 그리고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해서 나를 있지도 않은 삼촌의 못미더운 편지와 함께 이 시커먼 문 앞으로 보 내버린 컴퓨터, 이 모두를 저주하면서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믿을 만하다는 그 유서 깊은 보들린 장서각마저도 나를 낙 담시켰었다. 베일리얼 {{ 옥스포드에 있는 단과대학 }} 을 거쳐서 주문한 문헌 보따리와 주터미날은 지금쯤에서야 내 방에 도착해 얌전히 앉아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 터 백년이나 떨어진 그곳에 말이다. 이미 실습을 해치웠으니 충고를 쏟아대고 있어야 마땅한 키브린은 내가 도와 달라고 간청할 때까지 성자처럼 조용히 주위를 어슬렁거리 고만 있었다. "던워디 선생 만나고 왔니?" 그녀가 물었다. "그래. 그 작자가 소중한 정보랍시고 내게 가르쳐준게 뭔지나 알 아? '침묵과 겸손은 역사가의 신성한 의무라네.' 그리고 이런 소리도 하더군. '내 생각에 자네는 <세인트 폴 성당>을 좋아하게 될 걸세.' 흥, 과연 위대하신 분의 금과옥조 답더군. 불행히도 내게 필요한 건 폭탄이 떨어질 시간과 장소에 대한 정보라구. 그걸 알아야 내가 살아 남을 테니까." 나는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뭐, 좋은 생각 없어?" "너 기억 되살리기에 익숙하니?" 키브린이 물었다. 나는 일어나 앉았다. "아주 익숙한 편이지. 가만, 내가 <지식 흡수>를 해야 한다고 생 각하는구나?" "그럴 시간은 없잖니. 난 가능한 모든 걸 네 <장기 기억>속에 집 어 넣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녀가 말했다. "엔돌핀을 사용하는 거 말이야?" 내가 물었다. 기억보조 약물을 써서 장기 기억에 정보를 저장시키는데 가장 큰 문제는, 정보가 단기 기억에는 단 한순간도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복잡해지고 당연히 불편한 느낌이 든다. 즉, 전에 어디선가 본듯 한 것이 계속 알듯 말듯 가물거리는 그런 애매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주된 문제점은 불편한 느 낌이 아니라, 기억을 떠올리는 데 있다. 아무도 저장된 기억에서 필 요한 정보를 두뇌가 어떻게 불러오는지 정확히 모른다. 다만, 단기기 억이 관련되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잠깐씩, 때로는 극히 짧은 순 간이라도, 정보가 단기기억 상에서 머무는 현상을 볼 때, 단기기억은 단순히 정보를 떠올리는 역할 이외의 무언가에 쓰인다는 걸 의미한 다. 기억재생 과정에서의 전체적인 복잡한 정보의 분류 및 검색 과정 은 분명히 단기기억이 중심이고, 그러한 과정과, 단기기억상에 그런 과정이 일어나도록 도와주는 인공약물이 없으면, 정보는 떠올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시험을 치룰 때 엔돌핀을 쓰곤 했는데, 기억을 떠 올리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그 방법이 남은 시간 안에 필 요한 모든 정보를 머리 속에 저장하는 유일한 방법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방법을 쓰면 실은 필요한 정보를 아무 것도 모르는 상 태가 되어버린다. 심지어 모든 걸 다 잊어버릴 정도의 긴시간이 지나 도록 말이다. 즉, 그 정보를 불러올 수 있고, 불러왔을때만 그 정보 들을 <알게>되는 것이다. 그 때까지는 그 정보가 마음속 어느 구석에 도 없는 것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인 것이다. "너 약물 없이도 장기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거지?" 키브린이 미심쩍어 하면서 물었다. "아마 그래야겠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선? 잠도 못 잔 상태면? 체내의 엔돌핀 농도가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떠올릴 수 있어?" 키브린의 역사실습 내용은 정확히 뭐였을까? 키브린은 거기에 대 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학부생들은 거기에 관해선 묻지 못하게 되어 있다. 중세생활의 스트레스 요인? 스트레스야 누구나 겪 으면서 사는 거 아닌가? "그럴 수 있기를 바래야지. 어쨌든, 네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 한다면 그렇게 해볼께." 그녀는 무척 안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 것도 널 도울 순 없을거야." 고맙기도 하지, 베일리얼의 천사 키브린양. 아뭏든 나는 장기기억법을 썼다. 골동품 안경을 통해 껌벅껌벅 날 쳐다볼 던워디 선생 방에 앉아서 내가 세인트 폴 성당을 좋아하게 될 거라니 어쩌니 하는 따위의 말을 듣고 있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다. 보들린 장서각에 요청한 자료가 오지 않자 나는 있는 돈을 다 쳐박아 블랙웰의 자료들을 왕창 샀다. 이차 세계 대전, 켈트족 문학, 대중 수송 수단의 역사, 관광 안내 등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 테이프를 산 것이다. 그리고는 고속 녹음기를 하나 빌린 다 음, 장기기억에 그것들을 저장했다. 그러고나서도 여전히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너무나 두려워졌다. 그래서, 화재감시원 추모비를 보면 무슨 기억이 떠오르나 확인해보러 런던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서 루드케이트 언덕 으로 뛰어올라 갔다.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엔돌핀 농도가 아직 정상치로 돌아오지 않은 거야." 나는 애써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나 다가올 실습 생각에 전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것봐, 이건 진짜 총알이야. 역사실습 중인 역 사학도라고 해서 죽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는 거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지하철 안에서 역사책을 읽었고, 던워디 선생의 조교가 <세인트 존의 숲>으로 오늘 아침 날 데려 갈려고 올 때까지 계속 역 사책을 붙들고 한숨 못자고 깨어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마이크로 필름 사전을 뒷주머니에 쑤셔넣었고, 타 고난 재치 하나로 버티어 나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저 1940년대에 인공약물을 손에 넣을 수 있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첫 날 정도는 확실히 무사히 치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 도착해 부딪친 첫 마디에 얼어붙어 버렸던 것이다. 좋아. 그리 나쁘진 않아. 키브린은 단기 기억에 어떤 것도 넣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나는 영국 화폐, 지하철 선로도, 옥스포드 대학 의 지도를 암기했었다. 그래서 이 정도까지나 해낸 것이다. 확실히 대사제도 잘 상대할 수 있을 거야. 마침내 노크를 할 용기가 막 생겼 다. 그래서 문을 열 찰나, 대사제가 안에서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 고, 마치 총의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처럼, 그 순간은 곧 바로 지나갔 다. 고통도 없었다. 나는 준비한 편지를 건넸고, 악수를 했으며, 대 사제는 뭔가 이런 정도라고 생각되는 말을 했다. "바솔로뮤씨, 한 사람이 더 오셔서 기쁘군요." 대사제는 긴장하고 피곤한 표정이었다. <대공습>은 이제 막 시작 되었을 뿐이라고 그에게 알려주면,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릴 것만 같 았다. 그래, 그래, 함부로 말을 하지 말지어다. 신성한 역사학도의 침묵, 어쩌고 저쩌고 기타 등등. 그가 말했다. "죽 둘러보시도록 랭비가 이곳을 안내할겁니다. 괜찮으시겠죠?" 랭비라는 사람이 베개를 부둥켜 안고 있었던 작자가 아닐까 하고 있었더니, 역시나 그랬다. 그가 계단 아래에서 조금 헐떡거리긴 했지 만 기쁜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이 침대가 왔어요." 랭비는 매튜스 대사제를 보자 속사포처럼 입을 열었다. "그들이 무슨 친절이라도 베풀었다고 생각하실 건 없습니다. 더럽 게 거만하고 잘난체 하더군요. '이것봐, 껄쭉씨. 당신네들 때문에 한 까치도 못 땡기고 왔단 말 야.' 한 놈이 요러더군요.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죠. '그것 참 잘됐 군. 쌤통인 걸. 바지가랭이도 제대로 못챙긴 것같은데.' 라구요." 매튜스 대사제도 랭비의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간이침대들을 납골당에다가 설치했나?" 대사제는 이렇게 묻고서, 우리를 서로 소개했다. "바솔로뮤씨가 웨일즈에서 막 도착하셨네. 우리 봉사단에 지원했 지." 봉사단이라구? 화재 감시원인줄 알았는데. 랭비는 어둠 속에서 이런 저런 희미한 것들을 가리키면서 날 여기 저기로 안내했다. 그리고 나를 지하로 끌고 내려가서 납골당의 묘비 들 사이에 설치한 열 개의 접는 식의 간이 침대를 보여주었다. 가는 길에 넬슨제독의 검은 대리석 관도 보여주었다. 랭비는 첫날 밤에는 화재 감시를 설 필요가 없다면서, 공습 기간중에는 잠이 가장 소중한 것이니, 좀 자두라고 했다. 알 만 했다. 애인이라도 되는 듯 그가 가 슴에 우스꽝스러운 베개를 안고 다니는 꼴을 보면 말이다. "당신은 이 아래에서도 사이렌 소리를 들을 수 있나요?" 랭비가 베개에 머리를 완전히 파묻고 잘까 궁금해 하면서 물었다. 그는 낮은 석재 천장을 둘러보았다. "어떤 사람은 듣고 어떤 사람은 못듣고 그렇죠. 브린톤은 귀마개 가 있어야 할테고, 벤스 존스는 아마 지붕이 무너져도 그냥 자고만 있을 거요. 나는 베개가 있어야 해요.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든 자 기 조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거요. 안그러면, 당신은 걸어다니는 시체가 되는 거야. 금방 천당행이라구." 그 친절한 충고가 끝나자 마자 랭비는 오늘밤 화재감시원들을 배 치하러 나가버렸다. 그는 나가면서 베개를 간이침대에 던져놓고서는 아무도 자기 배게에 절대 손 못대게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내가 겪을 첫공습 사이렌을 기다리며 앉아서, 이 모든 상황 을 어떻게든 정리해 보려고 노력했다. 걸어다니는 시체꼴이 되지는 않아야 할테니까. 랭비가 사용했던 말들을 좀 알아볼 작정으로, 나는 이시대로 오기 전에 도서관에서 훔쳐왔던 마이크로 필름 옥스포드 사전을 꺼냈다. '타르트'는 빵과자 아니면 매춘부를 뜻한다고 되어 있었다. (아마 도 후자 같다. 비록 베개에 관해서는 내 추측이 틀렸지만 말이다) ' 부르조아'는 중산층의 모든 결점에 대한 포괄적인 용어였다. '타미' 는 병사이군. 에이아르피이는 어떤 철자를 추측해 봐도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거의 포기할 뻔 했는데, 갑지가 장기기억 속에서 전시 상황에서의 줄임말이나 약어에 관한 정보가 불쑥 떠올랐다. ARP. 공습대비센터(Air Raid Precautions). 그럼 그렇지. 다른 어디 서 그 빌어먹을 간이 침대를 구하겠어. 9월 21일 여기서의 첫번째 충격을 넘기고 나서 생각해보니,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역사학부는 이 석달 남짓의 실습에서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내게 지금 쓰는 이 일지와 내 삼촌이 썼다는 편지, 그리고 전쟁전 화폐로 10파운드만 건네주고, 나를 화물 부치듯 과거로 보내버렸다. 12월 말에 삼촌이 아프니 간호하러 오라 는 두번째 편지가 올 때까지, 그래서 <세인트 존의 숲>으로 되돌아 갈때 까지 그 10파운드(벌써 기차와 지하철 요금으로 거의 다 써버렸 다.)로 버티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는 랭비가 말한, 알콜로 절여 져 관 속에 누워 있다는 넬슨제독과 함께 여기 납골당에서 지내야 하 는 것이다. 만약 여기에 직격탄이라도 떨어지면, 넬슨 제독의 시체는 횃불처럼 활활 타오를까, 아니면 그냥 납골당 바닥으로 알콜이 새나 오는 와중에 와르르 쏟아져 버릴까? 식사는 풍로 하나만으로 준비되었고, 식탁 위에는 지독한 홍차에 무슨 맛인지도 모를 청어 구이가 올려졌다. 이 대단한 사치를 누리기 위해 나는 세인트 폴 성당 지붕을 지키고 서서, 소이탄들을 치워내야 한다. 그밖에도 나는 이 역사실습의 목적인 그 <어떤 것>을 해야한 다. 하지만,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삼촌으로부터 두번째 편지 가 와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는 것이다. 나는 랭비가 "자, 이제 지붕으로 올라갑시다." 라고 말할 때까지 계속 허드렛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작고 지저분한 생선들을 요리할 스튜 냄비를 닦았고, 납골당 제단 끝에 쌓아올려진 접는 나무 의자 (심야에 폭탄 터지듯 와장창 무너져 내리기 쉬웠기 때문에 의자 는 평평하게 접어 놓았다.)들을 청소했다. 그리고 잠을 자두려고 애 썼다. 나는 확실히 공습중에도 태평스레 잘 수 있는 행복한 스타일은 못 되었다. 밤이면 밤마다 세인트 폴 성당의 위험 등급이 얼마일까 생각 하면서 지샜다. 실습 대상은 적어도 위험 등급 6은 되기 마련이다. 지난 밤 나는 납골당을 위험 등급 0으로 치면 세인트 폴 성당은 위험 등급이 10은 되리라고 확신했다. 애초에 덴버를 지원했어야 옳았던 것이다. 이제껏 일어난 가장 흥미로운 사건은 고양이 한마리를 본 일이다. 나는 고양이에게 홀딱 반했다. 하지만, 안 그런 척 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여기서는 일상적인 일 같았기 때문이다. 9월 22일 납골당은 조용했다. 랭비가 이런 저런 정부기관에(모두 약자로 부 르면서 ) 연신 욕을 퍼부으면서 뛰어 들어왔다가, 내게 지붕 위를 보 여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갔다. 이럭저럭 하는 동안 지금껏 허드렛 일도 바닥이 나서 나는 소화용 손펌프 작동법을 혼자서 익히고 있다. 키브린은 내가 기억을 잘 불러올 수 있을까 몹시 염려했었다. 지금까 지는 아무 문제도 없다. 오히려 너무 잘되어서 걱정일 지경이다. 나 는 화재 진화에 관한 정보를 불러냈다. 소화용 손펌프의 사용지침과 사진도 함께 곁들여져 있는 완벽한 정보였다. 전체 작동법을 샅샅이 익혔다. 만약 어떤 미친 놈이 넬슨 제독의 관에 불이라도 지른다면 나는 일약 영웅으로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어제밤은 대단했다. 사이렌이 일찍 울려서, <시티> {{ 런던의 산업 및 금융의 중심 지구 }} 의 사무실을 청소하던 몇몇 잡역부들이 집에 못가고 우리와 함께 납골당에 대피했 었다. 그중의 한 명이 마치 공습경보 사이렌처럼 비명을 질러서 곤히 자는 나를 깨웠다. 쥐를 보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녀에게 쥐가 가버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고무 장화 를 가지고 묘비와 간이 침대를 온통 치면서 돌아 다녀야 했다. '역사학부에서 부과한 분명한 실습내용 한가지: 쥐잡기.' 9월 24일 랭비는 나를 데리고 성당 전체를 한바퀴 돌았다. 성가대석에서는 이미 혼자 익힌 소화용 손펌프 작동법을 랭비에게 다시 배워야만했 고, 고무장화와 양철 헬멧도 할당받았다. 랭비는 엘렌 대장이 석면 방화복 지급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물건이 오지 않은 탓 으로 내 모직 외투와 목도리로 방화복을 대신했다. 어쨌든 지붕 위는 9 월인데도 아주 추웠다. 마치 11월의 날씨 같았다. 해가 숨으면 날 씨는 더 음울하고 황량해졌다. 사람들은 돔 이나 지붕 위는 평평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마치 고의적으로 우리를 골탕먹이 려는 것 처럼, 탑이나 첨탑, 배수구, 조상(彫像) 등이 가득 널려 있 었다. 그런 것들은 소이탄이 떨어지면 우리의 손이 닿지 않도록 기가 막히게 배치되어 있었다. 랭비는 소이탄을 모래로 덮어서 끄는 시범 을 보였다. 지붕이 다타고 성당으로까지 불이 번지기 전에 꺼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서쪽 탑 중 하나에 올라가야 하거나 돔의 꼭대기 위로 올라가야 할 경우에 대비해서, 돔 아래 바닥에 잔뜩 쌓 아둔 로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와 <속삭임의 회랑>으로 내려왔다. 랭 비는 한바퀴 도는 동안 내내, 실제 상황 지침은 이렇고, 교회 역사는 저렇다는 둥 쉬지도 않고 계속 설명을 했다. <회랑>으로 올라가기 전 에는 나를 남쪽 문으로 끌고가더니, 예전의 세인트 폴 성당의 깨진 벽돌들 틈에 서있던 크리스토퍼 렌 {{ 세인트 폴 성당을 지은 영국의 유명한 건축가 }} 의 일화를 얘기했다. 그는 다타 버린 성당터에 주춧돌이 있던 자리를 표시할려고 인부 한사람에게 묘 지에서 묘비를 하나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그 주춧돌 위에는 라틴어 로 "다시 일어날 것이로다."라고 각인되어 있었고, 랜은 거기 새겨진 말대로 다시 성당을 재건하게 된 아이러니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이 다. 랭비는 역사학과 1학년이면 누구나 아는 그런 얘기를 말해주기 아깝다는 듯 잘난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화재감시원들 의 추모비에 관한 얘기라면 모를까, 딴 얘기는 내겐 그저 그런 것에 불과했다. 랭비는 나를 계단 위로 몰아 세워서, <속삭임의 회랑>을 빙도는 좁은 발코니 위로 올라가게 했다. 그는 <회랑>의 크기라던지 음향학 에 대해 크게 주절거리면서 어느새 반대편에 옮겨 가 있었다. 랭비는 반대편 벽에서 나를 마주보고 멈춰서서 조용히 말했다. "내가 지금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거요. 돔의 모양때문이지. 음파 는 돔의 둘레를 따라가면서 증폭이 되거든. 이 위에 있으면 공습중에 는 마치 돔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돔은 가로 너비가 약 52 미터이고 본당 위로의 높이는 약 24 미터요."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갑자기 난간이 내 아래로 사라지고, 검고 흰대리석 바닥이 아찔한 속도로 눈앞으로 치솟아 오르는 듯했 다. 나는 앞에 있는 무언가에 매달려 무릎을 꿇었다. 몸이 비틀거렸 고, 괴로웠다. 해가 나와 세인트 폴 성당의 모든 것이 황금빛으로 물 들었던 것이다. 성가대석의 조각된 나무와 하얀 돌기둥, 납색의 오르 간 파이프, 그 모든 것이 황금빛으로 보였다. 황금빛. 랭비가 내 곁 으로 와서 나를 끌어당겨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애썼다. "바솔로뮤!" 그가 소리쳤다. "무슨 일이요? 맙소사. 이 사람좀 보게." 나는 랭비에게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만약 내가 성당 을 구한다면, 세인트 폴 성당과 성당의 모든 역사는 나로 인해 엉망 이 될 것이며, 역사가인 나로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할 수는 없 다고 그런 모든 얘기들 말이다. 뭔가를 말하긴 했다. 그러나 그건 내 가 하려던 말이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랭비가 날 꽉 부여잡은 탓이 었다. 랭비는 나를 세게 잡아당겨 난간에서 떼어내고 계단으로 되돌 아 가게 했다. 그리고 내가 계단에서 맥없이 쓰러지자, 내 뒤에 아무 말도 없이 물러나 서 있었다.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군요. 전에는 고소 공포증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내가 힘없이 말했다. "떨고 있군. 아무래도 좀 눕는게 좋겠소." 랭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를 납골당으로 다시 데려갔다. 9월 25일 기억 불러오기: ARP 편람. 폭격 피해자 증상. 단계 1 - 쇼크, 마비, 상처의 무자각, 횡설수설. 단계 2 - 오한, 구토, 상처, 상실감, 현실을 다시 인식함. 단계 3 -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많아짐, 구해준 사람에게 자신이 받은 충격을 설명하고 싶어함. 랭비는 내 증세를 확실히 알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폭격도 없 는 상황에서의 그런 증세를 그가 어찌 생각할까? 나는 내가 보인 쇼 크를 랭비에게 설명할 수 없다. 설명을 하지 못하는 건 꼭 역사가의 신성한 침묵 때문만은 아니다. 랭비는 아무 말도 안했다. 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내게 내일 밤 첫번째 화재 감시 임무를 할당했다. 그리고 랭비는 특 별히 다른 사람보다 말이 많지도 않았다. 지금껏 내가 만난 사람은 어차피 모두 약간은 신경과민의 수다쟁이였고(내가 단기 기억에 암기 했던 정보 중 하나는 공습 중에 모든 사람이 얼마나 쥐죽은 듯 조용 했는가였다), 내가 여기 온 이래로 이 근처에 공습은 한차례도 없었 다. 공습은 대부분 <이스트 엔드> {{ The East End ; 이차세계대전 당시 집중적으로 공습을 받았던 런던의 한 지역 }} 나 부두 근처에서 있었다. 오늘 밤은 UXB {{ unexploded bomb, 불발탄 }} 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 나는 대사제의 거동이라 든가, <대공습> 기간에는 성당이 열려 있었다던 내 기억과 달리 성당 이 닫혀 있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었다. 시간이 좀 나자, 나는 즉시 9 월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려고 애를 썼다. 그 외의 다른 기억들에 관해서는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무엇이 적절한 정보일지 전혀 감 을 잡을 수가 없으므로 그냥 두었다. 역사가들에겐 행동 지침이나 제한같은 것은 없다. 만약 사람들이 믿어주기만 한다면, 나는 미래에서 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내가 만 약 독일에 갈 수 있다면 히틀러를 죽일 수도 있다. 죽일 수 없을까? 역사학부에서는 시간 패러독스에 대해 많이들 얘기한다. 그리고 역사 실습에서 돌아온 졸업생들은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도 안한다. 과거 는 변경되지 않는 완강한 것일까? 아니면 매일 새로운 과거가 태어나 고, 그걸 만드는 사람은 우리 역사가인 것일까? 우리가 하는 행동들 의 결과는 무엇일까? 결과가 있다면 말이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도 잘 모르면서 어떤 행동을 마구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몰락을 초래하지 않기나 바라면서 과감히 역사에 끼어들어야 하는걸까?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간섭도 안하고, 미래를 바꾸지 않기 위해서라면 세인트 폴 성당이 몽땅 불타는 걸 지켜보고만 있어 야 하는 걸까? 이 모든 것들은 밤늦게 골머리를 싸매기에 딱 알맞은 문제들이었 다. 그것들은 여기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내가 히틀러를 죽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인트 폴 성당이 불타는 걸 막을 수도 없 으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아. 어제 <속삭임의 회랑>에서 난 느꼈어. 만약 세인트 폴 성당에 불을 지르려는 히틀러를 붙잡기라도 하면 난 그 놈을 죽여버릴 거야. 9월 26일 오늘 젊은 여자 한 명을 만났다. 매튜스 대사제는 성당문을 열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시 성당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화재감시원 들은 잡역부로 일을 맡아서 했다. 그 젊은 여자는 키브린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키브린 쪽이 키가 훨씬 크고, 그렇게 볶은 머리 를 키브린이 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오늘 만난 여자는 마치 울고 있 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키브린은 역사실습에서 돌아온 이후에 한동 안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세는 그녀에게 너무 벅찼던 모양이었 다. 그녀는 지금 나같은 상황을 어떻게 버텨내었는지 궁금하다. 아마 틀림없이, 키브린은 교구 신부한테 자신의 공포를 마구 하소연 했을 것이다. 지금 키브린의 닮은꼴인 이 여자가 내게 그러지 않기를 간절 히 바라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뭘 도와드릴까요?" 도울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으면서 내가 물었다. "저는 자원봉사자입니다만." 그녀는 실망한 기색이었다. "보수를 안받는다는 말인가요?" 그녀는 그 말을 하고 손수건을 꺼내 빨개진 코를 닦았다. "세인트 폴 성당과 화재감시원에 대한 얘기들을 신문에서 읽었어 요. 그래서 혹시 성당에 제가 일할 자리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간이 식당이라든지, 뭐 그런거요. 보수가 있는 자리로요." 그녀의 빨개진 눈가로 눈물이 고였다. "성당에 간이식당이 없는게 유감이군요." 나는 언제나 키브린이 나를 얼마나 참을성 없게 만들었나 상기하 면서 최대한 친절하게 말을 했다. "그리고 사실 여기는 좋은 숙소가 없습니다. 어떤 화재감시원들은 납골당에서도 잠을 자죠.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모두 자원자들이랍니 다." "그러면 안되겠군요." 그녀는 손수건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려 눈물을 닦았다. "저도 세인트 폴 성당을 사랑하지만, 자원봉사 일은 할 수 없어 요. 시골서 돌아온 어린 동생 톰과 함께 있어야 하니깐요." 나는 그여자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는 무척 상심한 것처럼 보이는데 목소리는 꽤나 쾌활한 것이다. 게다 가 전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전 머무를 적당한 장소를 구해야 해요. 톰이 돌아왔으니, 지하철 역에서 계속 잘 수는 없거든요." 갑작스런 두려움, 무의식 중의 기억 재생시 때때로 겪는 그런 종 류의 날카로운 고통이 갑자기 느껴졌다. "지하철 역에서 잔다구요?" 기억을 살려보려고 애쓰면서 내가 물었다. "네, 보통은 <마블 아치> {{ Marble Arch 런던의 하이드 공원 내의 건축물 }} 역 안에서 자요. 내 동생 톰이 우리 자 리를 일찍 맡아놓으면 내가 그리로 가서......" 그녀는 말을 멈추더니, 손수건을 코 주위에 대고 코를 풀었다. "죄송해요. 이런 지독한 독감이라니." 그녀가 말했다. 빨간 코, 물기있는 눈, 재채기. 그렇지, 호흡기 감염증세. 내가 그녀에게 <울지 마세요>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지금껏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지 않은 것도 순전히 억세게 운이 좋았던 탓이었다. 사실 이런 상황이 생긴 건, 장기기억을 재생 하는게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나는 필요한 정보의 반도 채 저장하지 못한 것이다. 고양이, 감기, 그리고 세인트 폴 성당이 햇빛을 받을 때 어떻게 보이는지 따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에 부닥쳐 다시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였다. 그래도 나는 오늘 밤 화재감시를 끝낸 뒤에 기억재생을 시도했다. 적어도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날지, 또 일어난다면 그때가 언제일지는 알아볼 수는 있었다. 그 고양이를 한 두번 더 보았다. 놈은 새까만 검은 색 털에, 마치 등화관제시를 대비해 칠해 놓은 것처럼 목 주위에만 흰색 반점이 나 있었다. 9월 27일 막 지붕에서 내려왔다. 아직도 떨린다. 공습 초기에는 거의 <이스 트 엔드> 부근에만 폭격이 있었다. 그 광경은 눈으로 믿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사방에 서치라이트가 하늘로 치솟았고, 하늘은 화재로 붉게 물들었으며, 그 불빛이 다시 템즈강에 반사되었다. 폭탄은 폭발 하면서 불꽃놀이의 폭죽처럼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귀가 멀 정도로 계속되는 굉음사이로, 때때로 머리위로 높이 나는 비행기의 윙윙거리 는 소리가 들렸고, 대공포의 딱딱거리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밤 늦게 는 기차가 몸위로 지나가는 듯한 공포스런 소리를 내면서 폭탄들이 근방에 떨어졌다. 나는 지붕위에 납작 엎드리고 싶은 충동에 어쩔줄 몰랐다. 하지만, 랭비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돔에서의 있었던 그 런 추태를 다시 랭비가 좋아라 구경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나는 머 리를 꼿꼿이 세우고 모래 양동이를 손에 굳게 쥐었다. 자신이 꽤나 자랑스레 여겨졌다. 새벽 세 시를 지나서야 폭격이 멈췄다. 30분 정도 폭격이 뜸했다 가, 지붕 위에 마치 우박이 떨어진 것 같은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났 다. 랭비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삽과 소화용 손 펌프를 집으려고 몸을 날렸다. 랭비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소이탄 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이탄은 시계탑 뒤에 내게서 불과 몇 미터 거 리에 떨어졌다. 고작 한 30 센티미터 정도 길이였는데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작 았다. 소이탄은 내가 서있는 곳 근처까지 밝은 녹색 불꽃을 보내면서 격렬하게 칙칙거리고 있었다. 곧 그것은 부글부글 끓어 녹은 액체 덩 어리가 되어서 지붕을 태우기 시작할 것이다. 화염이 올랐고, 소방수 들이 미친듯이 고함을 쳤다. 그 순간 하얀 광휘가 수 킬로나 뻗치는 것 같았고, 더 이상 아무 것 없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화재감 시원의 추모비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정신을 차리니 다시 <속삭임의 회랑>이었다. 내가 뭔가를 말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런데 랭비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는 일그러진 웃음 을 짓고 있었다. "세인트 폴 성당은 불타버릴 겁니다. 전부 불에 타서 없어질 거라 구요." 내가 정신없이 더듬거렸다. "그렇겠지. 그럴 계획이잖아. 안그래? 성당을 몽땅 불태워버린다, 그게 계획이겠지?" 랭비가 물었다. "누구의 계획 말입니까?" 내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그야 물론 히틀러지. 누구 얘길 한다고 생각했소?" 랭비는 이렇게 말하고 불쑥 소화용 손펌프를 집어들었다. ARP 교본의 한 페이지가 갑자기 눈 앞에서 펄렁거렸다. 나는 불꽃 이 계속 튀고 있는 소이탄 주위에 모래 양동이를 퍼부었다. 그리고 다른 양동이를 낚아채서 다시 그 위를 덮었다. 검은 연기가 내 삽도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뿌옇게 피어올랐다. 나는 꺼진 폭탄의 끝을 건드려 보고 빈 양동이에 그걸 담았다. 그리고 삽으로 그 위에 모래 를 덮었다. 따가운 연기때문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굴을 돌려 소매에 눈물 을 닦고 랭비를 보았다. 그는 나를 도울 생각을 안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사실 나쁜 계획은 아니야.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 지. 화재감시원들이 여기에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거든. 불이 나나 지켜보려고 말요. 안그래, 바솔로뮤?" 역사실습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는 이제 알았다. 랭비가 세인트 폴 성당에 불을 지르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9월 28일 나는 지난 밤에는 내가 랭비를 오해했고, 말을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해보려 애를 썼다. 랭비가 나찌의 스파이가 아닌 바에야 왜 성당 에 불이 나기를 바라겠는가? 또, 나찌의 스파이라면 어떻게 화재 감 시원이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가짜 소개 편지로 여기온 내 경우를 생각해 보니 몸서리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밝혀내지? 혹시 1940년대의 애국적인 영국인 만이 알 수 있는 어떤 결정적인 사실로 그를 시험해 본다면? 아마 오히려 내쪽이 들통날 것이다. 어떻게든 기억 재생이 적절히 일어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그때까지는 랭비를 감시할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이라면, 그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랭비는 다음 두 주동안 화재감시원 배치를 끝내 놓았다. 우리는 같은 조였다. 9월 30일 9월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랭비가 내게 말해주었다. 지 난 밤에 성가대석에서 외투와 장화를 입으면서 그가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들은 벌써 한 번 시도를 했지." 무슨 말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마치 첫 날 나보고 에이아르피에 서 왔냐고 물었을때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성당을 파괴하려는 그 계획 말요. 놈들은 벌써 한번 시도를 했었 지. 9월 10일에. 고성능 폭탄이었지. 그러나 물론 당신은 그걸 모르 시겠지? 웨일즈에 있었을 테니 말이야." 나는 그의 얘기를 듣지 않고 있었다. 그가 "고성능 폭탄"이라는 말을 한 순간 관련 기억이 모두 떠올랐다. 그 폭탄은 길 아래로 굴을 파서 성당 기초 부분에 장착되어 있었다. 폭탄 해체반은 폭탄의 신관 을 제거하려 했지만 개스 누출이 크게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당을 비우기로 결정했는데, 매튜스 대사제는 떠나길 거부했고, 그래서 결 국 제거반은 폭탄을 떼어내 바킹마쉬즈 {{ Barking Marshes 런던 부근의 습지의 하나 }} 에서 폭발이 일어나게 만들 었다. 지금 막 즉각적이고 완벽한 기억 재생이 일어난 것이다. "폭탄 해체반이 성당을 구했지." 랭비가 계속 말했다. "마치 언제나 누군가가 성당을 지키는 것 같았지." "물론, 언제나 누군가가 있죠." 나는 이렇게 말하고 걸어가 버렸다. 10월 1일 어젯 밤에, 9월 10일에 있은 사건들에 관해 기억 재생을 해낸 것 은 일종의 돌파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밤새 간이침대 에 누워서 나찌 스파이에 대해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지만 허사 였다. 찾는 대상을 정확히 알아야만 기억재생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어쩌면 랭비는 나찌 스파이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체가 무엇일까? 방화범? 미친놈? 납골당은 생각을 집중하는데 전혀 좋은 장소가 못되었다. 묘지에 걸맞게 조용한 맛이 없었다. 잡역부들이 매 일 밤 떠들어 대는 통에 폭탄소리도 잘안들릴 지경이었으니. 기억재 생에는 떠드는 소리가 폭탄 소리보다 나빴다. 자꾸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 잠이 들었을때, 나는 지하철 역의 대피소가 폭탄에 맞아 대파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는 꿈을 꾸었 다. 10월 4일 오늘은 고양이를 잡으려 했다. 고양이를 이용해서 잡역부들을 놀 라게 하는 쥐들을 쫓아낼 작정이었다. 또 고양이를 코 앞에 두고 좀 자세히 보고 싶었다. 나는 대공포에서 발사되었던 불타는 유산탄을 끄느라 어젯 밤 사용한 양동이를 가지고 왔다. 양동이 안에는 여전히 물이 좀 남아 있었지만, 고양이를 익사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내 계획은 양동이로 고양이를 덮은 다음, 밑으로 손을 뻗어서 움 켜 잡을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그놈을 납골당 안으로 데려가서 쥐를 잡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 주위에 가보지도 못했다. 나는 양동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아마 물이 약간 튀겼을 것이다. 고양이는 애완동물이라고 기억이 났었는데 아마 그게 아니었던 모양 이다. 고양이의 기분좋게 넓적한 얼굴이 지독히도 무섭게 생긴 해골 로 바뀌었고, 온순해 보였던 발에서 표독스런 발톱이 뻗쳐져 나왔다. 그리고 고양이는 잡역부들 머리 꼭대기까지 높은 비명을 질러댔다. 놀란 나머지 나는 양동이를 떨어뜨렸고, 양동이는 굴러가 기둥에 부딪쳤다. 고양이는 사라져 버렸다. 뒤에서 랭비가 말했다. "고양이는 그런 식으로 잡는 게 아니지." "정말 그렇네요." 내가 말했다. 그리고 양동이를 도로 집으려고 허리를 굽혔다. "고양이는 물을 싫어하니까." 그가 말했다. 여전히 무표정한 목소리였다. "아," 나는 양동이를 납골당으로 다시 가져다 놓으려고 랭비의 앞을 지 나가려 했다. "그건 몰랐어요." "누구나 그 정도는 알지. 심지어 웨일즈에서 온 멍청이라도 말이 야." 10월 8일 우리는 일주일 동안 감시를 두 배로 했다. 폭격하기 딱 좋은 달빛 때문이었다. 랭비는 지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를 찾아보러 성당에 갔다. 서쪽 문 근처에서 어떤 노인과 얘기를 하 며 서 있는 랭비가 보였다. 노인은 신문을 접어 팔 아래에 끼고 있었 다. 노인은 그걸 랭비에게 건넸다. 그러나 랭비는 그걸 다시 돌려주었 다. 그 노인은 나를 보자 황급히 도망쳤다. 랭비가 말했다. "관광객이었소. 나보고 윈드밀 극장이 어디있는지 묻더군. 신문에 서 여자들이 홀딱 벗고 나온다는 걸 본 모양이던데." 내 표정에 그 말을 전혀 믿지 않는게 드러났나보다. 랭비가 이렇 게 말을 한 것이다. "당신, 마치 기분 나쁜 노인 같은 표정이군. 잠을 제대로 못잤나 보지? 오늘 밤엔 다른 사람더러 당신의 첫번째 화재 감시 임무를 맡 으라고 해야겠군." "아뇨." 나는 냉냉하게 말했다. "순번을 지킬겁니다. 지붕 위에 있는게 좋으니까요." 그리고는 혼잣말로 덧붙였다. 그래야 널 감시할 수 있지. 랭비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아래 납골당에 쳐박혀 있는 것보다는 낫겠구만. 적어도 지붕에서 는 누가 당신 뒤로 숨어드는 걸 알 수는 있을테니." 10월 10일 화재감시 임무를 두배로 서는 것이 내게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재생의 어려움에 대한 고민도 좀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말 이다. 원래 주변에서 쳐다보면 더 잘 보이는 법이고, 실제로 그것이 때때로 효과가 있다. 뭔가 다른 것을 몇 시간 생각하거나 혹은 하룻 밤 푹 자고나면 알고 싶은 일들이 별 자극이나 인공약물 없이도 곧잘 떠오른다. 그러나 하룻밤 푹 자는 것은 불가능했다. 잡역부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댈 뿐 아니라, 고양이도 납골당으로 와서 야옹거리면서 생선을 달라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넘나든다. 화재 감시를 나가기 전에 나는 내 간이 침대를 회당 가장자리 쪽에서 넬슨의 묘가 있는 쪽으로 옮겼 다. 넬슨은 알콜에 절어 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입은 다물고 있으니 까. 10월 11일 나는 트라팔가 해전의 꿈을 꾸었다. 배에서는 포를 쏘고, 온 사방 에 연기가 자욱한데다 이곳 저곳에 석회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랭비가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서 처음 든 생각은, 접는 의자가 어디로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자욱한 연기 때문 에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지금 갑니다." 나는 장화를 당겨 신으며 허둥대면서 랭비쪽으로 갔다. 석회가 산 더미 처럼 쌓여 있었고, 회당 양 끝쪽에 접혀 쌓여있던 의자가 이리 저리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랭비는 그속을 파헤치고 있었다. "바솔로뮤!" 랭비는 큰 석회 덩어리를 옆으로 내던지면서 외쳤다. "바솔로뮤!" 나는 그때까지도 불이 난 줄 알았다. 나는 뛰어가 얼른 손펌프를 가져왔다. 그리고 랭비 옆에 무를을 꿇고 뒤쪽의 쪼개진 의자에 손펌 프를 들이댔다. 펌프는 제대로 작동하질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가 눈에 들어왔다. 아래에 시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천장에서 떨 어진 어떤 물체에 손을 뻗치다가 그것이 잘려나간 손이란 것을 발견 했다. 나는 펄쩍 발 뒷꿈치로 물러섰다. 그리고, 토하지 않겠다고 굳 게 다짐하면서 다시 다가갔다. 랭비가 의자 다리를 가지고 여기 저기 를 마구 헤치고 들어가는 통에, 그의 팔을 붙잡아 세워야 했다. 그러 자 랭비는 마치 파편 조각인 것처럼 나를 뿌리치느라 몸을 흔들었다. 랭비는 커다랗고 평평한 사각형 석고 조각을 주워 들었다. 그 밑에는 마루가 있었다. 몸을 돌려서 뒤를 쳐다보았더니, 잡역부들도 제단 근 처의 후미진 구석에 모여들었다. "누구를 찾는 겁니까?" 내가 계속 랭비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바솔로뮤." 파편 조각을 옆으로 치우면서 그가 말했다. 분진으로 온통 뒤덮 힌 랭비의 손에서는 피가 배 나오고 있었다. "나 여기 있어요. 나는 무사합니다. 간이침대를 여기서 빼내 옮겼 었단 말입니다." 하얀 분진때문에 기침이 났다. 랭비가 돌연 고개를 잡역부들에게 돌리더니,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 밑에는 누가 있는 거요?" "풍로 밖에 없어요." 잡역부 중 하나가 그늘진 구석에서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갈브레이드 부인의 지갑이요." 랭비는 그 둘다를 발견할 때까지 주위를 온통 파헤쳤다. 풍로는 비록 불은 꺼졌지만 개스가 아주 많이 새고 있었다. "당신이 결국 성당과 나를 구했군요. 모두 개스에 질식해 죽을 뻔 했네요." 속옷 차림에 장화를 신고서 그리고 그 쓸모없는 손펌프를 손에 들 고 내가 말했다. 갑자기 랭비가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구하지 말았어야 했어." 피폭격자 증상 제 1 단계 : 쇼크, 마비, 상처의 무자각, 횡설수 설. 랭비는 자기 손에 피가 난 것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말한 것을 기억도 못할 것이다. 그는 내 목숨을 구하지 말아야 했다 고 말했던 것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당신을 구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겐 의무가 있는 거야." 내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피가 나는군요. 좀 눕는게 좋겠습니다." 나는 랭비에게 회랑에서 그가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10월 13일 그것은 고성능 폭탄이었다. 폭탄은 성가대석 근처에 구멍을 내었 고 대리석 조각 몇 개가 부서졌다. 그러나 납골당의 천장은 무너지지 않았다. 단지 진동만 시켜서, 천장의 회칠에 금이 갔을 뿐이다. 내가 해낸 생각은 그게 전부였다. 나는 랭비가 자신이 말한 것을 기억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 것이 내게 어떤 종류의 이점을 주었다. 이제는 위험이 어디에 있는지 가 분명했고, 다른 방향에서 위험이 닥쳐오진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런 걸 안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는가? 랭비가 어떤 짓을 할 지, 그리고 언제 그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확실히 내 장기기억에는 어제의 폭탄과 관련된 사실이 들어있었 다. 그러나 이번엔 부서져 떨어지는 석회 가루도 장기기억을 자극해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 못했다. 이제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지도 않았 다. 그저 지붕이 무너져 내리기만 기다리며 어둠 속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랭비가 왜 내 목숨을 구하려 했을까 고민을 했다. 10월 15일 오늘 그 여자가 다시 찾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감기에 걸려있었지 만, 보수가 있는 직업을 구해서 즐거워보였다. 그녀는 깔끔한 제복차 림에 발가락이 나온 신발을 신고, 머리카락은 얼굴 주위로 정교하게 곱슬거리도록 만든 모습이었다. 우리는 아직도 폭탄때문에 생긴 이런 저런 것들을 치우고 있었다. 그리고 랭비는 성가대석 천장에 댈 판자 를 구하러 엘렌 대장과 나갔기 때문에, 나는 청소를 하는 동안 그 여 자와 수다를 떨 수 있었다. 그녀는 콜록거렸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나도 그 기침이 먼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내게 자기 이 름이 에놀라라고 했다. 그리고 WVS {{ Women's Voluntary Service 여성 봉사단 }} 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화재가 난 장소에 파견하는 이동식 간이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녀는 그 일을 맡게 된 것을 내게 감사하러 왔다고 했다. 세인트 폴 성당의 간이식당에는 적당한 숙소가 없다는 말을 WVS에 하니까, <씨 티>에서 그녀에게 간이식당 운영일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이 끝나면 잠시 들러, 내가 어떻게 사는 지 당신에게 보여줄려고 해요. 괜찮죠?" 에놀라와 동생 톰은 여전히 지하철 역에서 잤다. 그녀에게 거기가 안전하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아마 아닐거라고 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밑에선 다가오는 위험을 못 느낄테고, 그것도 하나의 축복일 것이 다. 10월 18일 나는 이 기록을 도저히 쓸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한 상태이다. 아홉 개의 소이탄과 지뢰 한 개가 오늘밤 떨어졌다. 바람이 지뢰가 달린 낙하산을 날려버리지 않았으면 그것은 돔에 떨어졌을 것이다. 나는 소이탄 두 개를 껐다. 이곳에 온 이후로 줄잡아 소이탄을 20개는 껐다. 그리고 다른 사 람이 끄는 걸 수십 번은 도왔다. 그래도 여전히 그 정도로는 충분하 지 않다. 단 하나의 소이탄이나 단 한 순간이라도 랭비를 놓치거나 하면 모든 것은 허사가 된다. 이렇게 피곤하게 된 이유를 부분적으로는 알고 있다. 나는 내 일 을 다하면서, 랭비를 감시하고, 떨어지는 소이탄을 하나도 놓치지 않 으려고 온 힘을 다한다. 그리고 납골당으로 돌아와서는 또 스파이나, 화재, 1940년 가을의 세인트 폴 성당에 관한 무언가를, 혹은 그 어떤 것이든 기억해 내려고 온갖 애를 다 쓰는 것이다. 뭔가를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느낌이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무얼 더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억 재생 없이는, 나는 여기 이 불쌍한 사 람들과 하등 다를 것 없는 처지였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전 혀 모르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다시 미래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이런 식으로 일을 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소이탄을 끄고 있는 한 랭비는 결코 성당을 불 태울 수 없다. "내겐 할 일이 있어." 랭비가 납골당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나도 나의 할 일이 있었다. 10월 21일 폭탄 사건이 있은지 거의 두 주가 되었다. 그리고 방금 그 사건 이후로 고양이를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는 납골당에 서의 그 사고 더미에는 없었다. 랭비와 나는 그 더미안에 아무 것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도, 두 번이나 더 확인겸 자세히 찾아보았다. 고양이는 납골당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벤스 존스 노인이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고양이는 괜찮을 거야. 독일놈들이 바로 머리 위까지 날아와서 폭탄을 떨어뜨려도, 고양이들은 왈츠를 추면서 그들을 마중 나가지. 왜 그런줄 알아? 고양이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사람은 반 이상이 쓸데 없는 걱정을 하다가 죽지. 스테파니에 사는 한 노파 는 얼마 전에 그녀의 고양이를 구하려다가 죽었지. 그 망할 놈의 고 양이는 실은 앤더슨네 집에 가 있었더라구." "그러면 고양이는 지금 어디 있죠?" "어디 안전한 곳에 있겠지, 뭐. 내기해도 좋아. 그 놈이 만약 성 당 주위에 없다면 우린 죽음을 목전에 둔거야. 옛 말에 가라앉을 배 는 쥐들이 미리 알고 떠난다잖아. 그건 틀린 소리야. 미리 떠나는 건 쥐가 아니라 고양이라구." 10월 25일 전에 랭비를 찾아왔던 손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노인이 여전히 윈드밀 극장을 찾고 있을리는 없지 않은가. 노인은 오늘도 신 문을 팔에 끼고 있었다. 그리고 랭비를 찾았는데, 랭비는 소방수들의 방화복을 구해보려고 엘렌 대장과 건너편 시가지에 내려가 있었다. 나는 그 신문의 제목을 보았다. <노동자>. 나찌의 기관지일까? 11월 2일 일주일 내내, 나는 서투른 일꾼들이 폭탄 자국을 메꾸는 걸 돕느 라 지붕 위에 올라갔다. 그들은 지독히도 일을 못했다. 폭탄 자국 한 쪽에는 여전히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정도의 틈이 있 는데도, 그들은 끝내 그 정도는 괜찮다고 우겼다. 그 구멍을 통해서 떨어져봤자 천장이고 "그 정도서 떨어져서는 안죽어요." 라고 버텼 다. 그들은 소이탄을 몰래 숨기기에 그 곳이 안성맞춤인 장소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랭비에게는 바로 그런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그는 성당을 파괴하 기 위해 불을 지를 필요도 없었다. 그냥 소이탄 하나를 손이 안닿는 장소에 놔두면 그 걸로 끝일테니까. 일꾼들과는 도통 말이 안 통했다. 그래서 매튜스 대사제에게 얘기 를 할려고 내려갔다. 그런데 랭비와 그의 수상한 손님이 기둥 뒤에 붙어 서 있는 걸 보았다. 랭비는 신문을 쥐고 있었고 그 노인에게 무 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한 시간 후 내가 도서관에서 돌아왔을때도 그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지붕의 구멍도 그대로 있었다. 대사제는 두꺼운 판자를 덮어두고는 별 일 없기를 기도나 하자고 했 다. 11월 5일 나는 기억 재생을 포기해버렸다. 자고 일어난 다음에 시도를 해도 계속, 이름을 잘 알고있던 신문에 관한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제 계 속 두배로 감시 임무를 서야했다. 잡역부들은 모두 우리를 떠나갔다 (마치 고양이처럼). 그래서 납골당은 고요했고, 그런데도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만약 간신히 졸기라도 한 경우에는 어김없이 꿈을 꿨다. 어제는 키브린이 성자처럼 차려입고 지붕 위에 서있는 꿈을 꾸었다. "네 역사실습의 비밀은 무엇이었니? 무엇을 발견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냐구." 내가 물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코를 풀더니, 이렇게 말했다. "두 가지였어. 하나는 침묵과 겸손이 역사가의 신성한 의무라는 거구, 또 하나는 -- " 키브린은 말을 멈추고 손수건에 대고 재채기를 했다. "지하철 역에서는 자지 말라는 것이야." 내 유일한 희망은 인공약물을 손에 넣어서 무아지경을 유도하는 것 뿐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화학적 엔돌핀과 환각제 같은 걸 쓰기 엔 아직 시대가 이르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알콜은 분명히 구할 수 있겠지만, 내가 유일하게 아는 술 이름인 <에일 맥주>보다는 뭔가 더 독한 것이 필요했다. 나는 함부로 다른 화재감시원에게 부탁하지는 못했다. 랭비가 이 미 충분히 나를 의심하고 있다. 모르는 단어들을 찾아보기 위해 다시 옥스포드 영어 사전을 꺼내들었다. 11월 11일 고양이가 다시 돌아왔다. 랭비는 여전히 석면 외투를 구해보러 엘 렌 대장과 나갔다. 그래서 세인트 폴 성당을 나갔다와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일용품을 좀 구해보려고 식료품 가게에 갔다. 어쩌면 인공 약물을 구할 수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시간이 좀 늦었다. 그래서 <칩사이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이렌 이 울렸다. 그러나 공습은 대개 어두워지기 전까진 시작되지 않는다. 잠시후 나는 식료품 가게마다 들러서 술이 있는지 물어보느라 용기를 짜내야 했다. 가게 주인은 선술집에 가보라고 했다. 그런데 가게에서 나오니 갑자기 구멍 속으로 뛰어든 토끼처럼 느껴졌다. 세인트 폴 성당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막 지나온 거리며 상점이 어디에 위치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청어가 든 갈색 종이 봉투 꾸러미를 끌어안고 빵을 손에 든 채, 바로 코앞도 못 알아볼 세상에 서 더 이상 보도가 아닌 곳에 서 있었다. 손을 뻗어 목도리를 목에 더 꼭 감고, 나는 앞이 제대로 다시 보이길 기도했다. 불빛이라곤 하 나도 없었다. 성당의 화재감시원들이 전부 저주하고, 다섯번째 공산 주의자라고 욕을 해댄 달이라도 보았으면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아 니면 단지 주위의 방향을 짐작할 정도로 차단된 전조등을 단 버스라 도, 아니면 서치라이트라도. 그것도 아니면 대공포의 반동 화염이라 도. 그 어떤 것이라도. 바로 그때, 멀리서 두 개의 좁은 노란색 틈이 비쳐 보이는 버스가 나타났다. 나는 버스를 향해서 움직이다가 하마 터면 갓돌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이 사실은 버스가 인도 쪽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즉 내가 본건 버스가 아니라는 걸 뜻이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고양이가 야옹거렸다. 고양이는 내 다리에 몸을 부벼댔다. 버스에서 나오는 불빛이라고 생각했던 노란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사방 어디에도 빛은 없었다고 맹세할 수 있지만, 고양이 눈은 어디선가로 부터 나오는 빛을 뿜어내 고 있었다.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그 눈빛이 내게 비치고 있었다. "그 눈빛때문에 문지기에게 들키겠구나. 늙은 고양이 톰아." 내가 말했다. 그때 머리위로 비행기가 윙윙거리며 날았다. "아니면 독일놈한테 들키던지." 그말과 동시에 갑자기 폭발이 치솟으며 빛이 타올랐다. 서치라이 트와 태임즈 강변의 불길이 거의 동시에 섬광을 발했다. 그 불길과 섬광이 집으로 가는 내내 길을 밝혔다. "나를 데리러 왔구나. 그렇지? 늙은 고양이 톰." 내가 쾌활하게 말했다. "그동안 어디 었었니? 청어가 다 떨어진 걸 알고 미안해서 떠났었 구나. 그렇지? 기특하기도 해라." 성당으로 돌아가는 내내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반깡통의 청어를 주었다. 벤스 존스 노인은 식료품 가 게에서 우유를 본 것 같다고 말했다. 11월 13일 길을 잃는 꿈을 꾸었다. 등화관제 중이었다. 눈앞에 갖다댄 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던워디 선생이 와서 내게 손전등을 비추었다. 그러나 내가 온 방향만 보일 뿐, 어디로 가야할 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어떤 것이 좋은 것인가요? 그들은 갈 방향을 비춰줄 빛 이 필요합니다." 내가 물었다. "템즈강에서 반사된 빛도 좋은가? 화재와 대공포에서 나온 빛이라 도?" 던워디 선생이 반문했다. "네. 어떤 것도 끔찍한 이 어둠보단 낫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 더 가까이 다가 와 손전등을 건네 주었다. 그것 은 결국 손전등이 아니었다. 남쪽 본당의 헌트의 그림에 그려져 있던 등불이었다. 나는 그 걸로 집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 앞의 갓돌을 비 추었다. 그러나 등블에 비친 건 갓돌이 아니라 화재감시원들의 추모 비였고, 나는 놀라서 등불을 꺼버렸다. 11월 20일 오늘 나는 랭비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다. "전에 당신이 그 늙은 신사와 얘기하고 있는 걸 봤어요." 마치 범죄자를 기소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바로 그렇게 들리길 원했다. 랭비에게 내 말이 그렇게 들리고, 그가 계획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즉각 중단하길 원했다. "노인에게 신문을 읽어주고 있었지. 얘기를 한건 아니었어" 그가 말했다. 랭비는 성가대석에 모래주머니를 쌓으며 이것저것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표현하고 싶으시다면, 좋아요, 나는 당신이 노인에게 신 문을 읽어주는 걸 봤습니다." 호전적인 내 말에 랭비는 모래주머니를 던져두고 일어섰다. "그게 어떻단 말요? 여긴 자유국가요. 내가 원하면 노인에게 신문 을 읽어줄 수도 있소. 당신이 조그만 WVS 계집애하고 노닥거릴 수 있 는 것 처럼 말이요." "무엇을 읽어줬죠?" 내가 물었다. "뭐든 그가 원하는 걸. 그는 노인이오. 그는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브랜디를 몇 모금 마시곤, 아내가 신문을 읽어주는 걸 듣곤 했지. 하지만 아내는 폭격으로 죽었고, 이제 내가 노인에게 신문을 읽어주고 있지. 도대체 당신이 무슨 상관이지?" 사실인 것 처럼 들렸다. 거짓말 할 때면 나타나는, 무심한 척 하 는 주도면밀한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거의 믿을 뻔했다. 하지만, 전 에도 몇 번이나 그가 그런식으로 진실을 가장해 말하는 걸 들은 기억 이 났다. 납골당에서. 그리고 폭탄사건 후에. "나는 노인이 윈드밀 극장을 찾는 관광객인 줄 알았는데요?" 내가 물었다. 랭비는 잠시 멍한 것 같더니, 다시 말했다. "아, 그래. 그렇지. 노인은 신문을 가지고와서 내게 그 극장이 어 디있는지를 물었었지. 나는 주소를 찾으려 신문을 봤고. 기억력도 좋 군. 그랬지. 나는 노인이 혼자서 신문을 읽을 수 없다는 걸 생각도 못했지." 그걸로 충분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는 위험하게 모래주머니를 내 발 바로 앞에다 던져놓았다. "물론 당신은 그런 걸 이해할 수 없겠지. 안그래? 간단한 인간적 인 친절 같은 거 말이요." "그래요. 이해가 안되는 군요." 나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이 대화가 무엇을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어떤 인공약물 이름인 듯한 <브랜디>라는 말만 하나 랭비에게서 건졌다. 매튜스 대사제에게 가서 랭비가 크게 신문을 읽었다고 일러바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랭비가 성가대석에서의 일을 끝내고 납골당으로 내려가기를 기다렸 다. 그리고 나서 모래주머니 하나를 지붕 위로 들어올려서 문제의 그 구멍위로 가져갔다. 널판지를 댄 것은 지금까지는 버티고 있었고, 모 두가 마치 무덤이기라도 한 것처럼 조심스레 그 주위를 돌아 다녔다. 나는 모래주머니를 연 다음 모래를 구멍바닥에 부었다. 만약 언젠가 랭비가 이 틈속에 소이탄으로 집어 넣는다면, 아마도 이 모래가 그 소이탄을 꺼버릴 것이다. 11월 21일 나는 오늘 에놀라에게 <삼촌이 준> 돈을 좀 주고 그녀에게 브랜디 란 걸 좀 구해달라고 했다. 에놀라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싫 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마 내가 잘 모르는 사회적으로 복잡한 속사 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구해보겠노라고 했다. 나는 에놀라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에놀라는 내 게 남동생에 대해서, 그리고 남동생이 지하철역 안에서 장난를 쳐 경 비원과 마찰을 일으킨 사건에대해 얘기했다. 그러나 내가 브랜디를 부탁한 뒤에는 얘기를 하다말고 떠나버렸다. 11월 25일 오늘 에놀라가 왔다. 그러나 브랜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휴일동안 숙모를 만나러 <바쓰>에 가는 길이었다. 적어도 에놀라는 잠시라도 공습에서 벗어날 것이었다. 그녀에 대해서 걱정을 할 필요 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동생에 대한 얘기를 마저하고, 숙모를 설득 해 톰을 대공습 기간동안 맡기려 한다는 것과, 그리고, 과연 숙모가 그러려 들지는 걱정이라는 얘기를 했다. 어린 톰이란 녀석은 예비 망나니 정도를 넘어서 거의 범죄자인 것 같았다. 그 자식은 <뱅크>역 대피소에서 두번이나 소매치기를 하다 잡혔다. 그래서 에놀라와 녀석은 다시 <마블 아치>역으로 돌아 가야 했다. 나는 어떤 소년이라도 한때는 빗나가는 법이라며 최선을 다해 그녀를 위로했다. 사실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동생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어린 톰이란 놈은 내 고양이 톰처럼 그 자신 외에는 누구에게도 철저히 무관심해서, 대공습에서 틀림없이 생 존할 거라는 것, 그리고 미래에도 두각을 나타낼 만한 진짜 생존자 타입이란 그런 얘기들이었다. 에놀라를 위로한 뒤 나는 브랜디를 구해왔는지를 물었다. 에놀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발가락이 나온 자신의 신발만 쳐다보 며 더듬거렸다. "당신이 그 생각을 다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술 한병이 있으면 화재감시원들이 감시를 교대해 준다고 얘 기를 지어냈다. 그러자 그녀 표정이 좀 나아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녀가 <바쓰>로의 여행을 구실로 술을 사오지 않을까봐 걱정이 되었 다. 아무래도 나는 세인트 폴 성당을 떠나서 직접 술을 사야할 것같 다. 하지만 함부로 랭비를 성당에 혼자 남겨둘 수가 없었다. 나는 에 놀라에게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오늘 브랜디를 가져다 준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밤도 오기 전에 벌써 사이렌이 울렸다. 11월 26일 에놀라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바쓰>로 가는 기차가 정오에 떠나 노라고 했었다. 적어도 에놀라가 런던에서 벗어나 안전하리라는 사실 에는 감사할 수 있었다. 아마 <바쓰>에서는 그녀의 감기가 다 나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밤엔 ARP의 여성 단원들이 들이닥쳐서 우리 간이 침대의 반 을 빌려갔다. 그들은 <이스트 엔드> 지역에서의 난장판에 대한 얘기 를 해주었다. 지상 대피소가 폭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넷이 죽고 열 두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도 거긴 지하철역 대피소는 아니었어요. 지하철역 안에서 벌 어졌던 진짜 난장판을 보셨을 거에요, 그렇죠?" 여성 단원이 말했다. 11월 30일 나는 <세인트 존의 숲>으로 고양이를 데려가는 꿈을 꾸었다. "이 고양이는 구조 사절단인가?" 던워디 선생이 물었다. "아닙니다. 교수님." 나는 자랑스레 말했다. "저는 역사실습에서 발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완벽 한 생존자. 강인하고, 수완있고, 이기적인 존재. 이 고양이야말로 제 가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입니다. 에놀라의 동생은 <바쓰>에 가 버렸습니다. 알시다시피, 성당이 불타버리는 걸 막으려면 나는 랭비 를 죽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랭비를 죽일 수가 없어요. 에놀라는 겨울에 발가락이 나오는 신발을 신고 지하철역에서 잡니 다. 또 머리를 말려고 금속핀을 머리에 끼웁니다. 그녀는 아마 <대공 습>에서 생존할 수 없을 거에요." 던워디 선생이 말했다. "아마도 자네가 그녀를 구해야 겠군. 이름이 뭐라고 했지?" "키브린."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섬뜩해져서 깨어났다. 오들오들 몸이 떨렸다. 12월 5일 랭비가 소형 폭탄을 가지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는 폭탄을 팔 아 래에 갈색 종이 꾸러미처럼 끼고, 세인트 폴 정거장에서 나와 루드게 이트 언덕을 따라 서쪽문으로 가고 있었다. "이건 공정하지 못해요." 내가 팔을 벌려 그를 막으며 말했다. "지금은 근무중인 화재 감시원이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랭비는 마치 베개처럼 폭탄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건 당신 잘못이야."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소화용 손펌프와 양동이에 가까이 다가 가기도 전에 랭비는 폭탄을 문 안에 던져넣었다. 랭비가 들고 있던 소형 폭탄은 심지어 20세기 말까지도 발명되지 않았었다. 낙담한 공산주의자들은 소형 폭탄이 발명된지 10년이나 지 난 뒤에야 폭탄을 손에 넣었고, 팔밑에 끼고 다닐 수 있는 것으로 개 조했던 것이다. 한 꾸러미만 가지고도 <시티> 지역의 사분의 1을 날 려서 망각 속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건 실제 일어날 리가 없는 꿈일 뿐이야. 꿈 속에서는 햇볕이 비치며 환하게 아침이 밝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화재감시 임무를 마쳤을때, 몇 주만에 처음으로 태양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납골당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와서 지붕 위를 두 번 더 돌고는 소이탄이 사이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계단이나 바닥 이나 모든 미심쩍은 통로들을 점검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 졌다. 그러나 잠이 들자 다시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성당에 불이 나 있었고, 랭비가 웃으면서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12월 15일 오늘 아침 그 고양이를 발견했다. 어젯 밤에는 공습이 아주 심했 지만 대부분은 캐닝 타운을 향한 것이었고, 성당 지붕 위에는 특기할 만한 사건이 없었다. 그런데도 고양이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아침 에 혼자 개인적인 순찰을 돌 때 그놈이 계단에 있는 걸 발견했다. 뇌 진탕. 고양이에게는 등화관제 때 돋보이는 목에 있는 흰색 반점을 제 외하고는 어디에도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털가죽 아래에는 온통 피 투성이었다.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순간 매튜스 대사 제에게 고양이를 납골당에다 안장해도 되겠냐고 물어볼까 하는 미친 생각을 했다. 트라팔가, 워털루, 런던 전장 등에서 영광되게 죽기라 도 해야 가능할테지. 나는 목도리로 고양이를 싼 다음, 루드게이트 언덕으로 가서 폭격을 받아 쑥밭이 된 건물의 파편 더미 속에다 묻어 주었다. 아마도 소용없는 짓일 게다. 파편 조각들은 개나 쥐를 막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이고, 다시 또 목도리를 구할 수도 없을 테 니 말이다. 나는 삼촌이 주었다는 돈을 거의 다 써버렸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안돼. 복도와 나머지 계단을 아직 점검하지 못했어. 그곳에는 불발탄이나 소이탄이나 내가 빠뜨린 그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몰라. 여기 처음 왔을 때, 나는 자신이 고귀한 구원자이며 과거의 보존 자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 역할을 잘해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에놀라는 지금 안전하다. 세인트 폴 성당도 안전하게 <바쓰> 로 보내버릴 수 있으면 싶다. 어젯 밤에는 거의 공습이 없었다. 벤스 존스 노인은 고양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었 다. 만약 고양이가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려 내게로 오던 길이었다 면? 어젯 밤에는 모든 폭탄이 캐닝 타운에 퍼부어졌었다. 12월 16일 에놀라는 일주일 전에 돌아와 있었다. 내가 죽은 고양이를 발견했 던 서쪽 계단에 그녀가 서 있거나, <마블 아치>역에서 잠을 자며 결 코 안전하지 않은 모습을 보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당신은 <바쓰>에 가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바보스럽게 물었다. "숙모는 톰은 데리고 있을 수 있어도 나까지는 안된다고 했어요. 집안 가득히 피난온 아이들이 있었고, 얼마나 시끄러운지 말도 못해 요. 당신 목도리는 어디다 두었어요? 여기 언덕 위에는 몹시 추운 데." 그녀가 물었다. "목도리는......" 나는 도저히 고양이 얘기를 할 수는 없어서 둘러댔다. "잃어버렸어." "다시 구하기는 어려울텐데. 의류도 배급제를 실시할거래요. 그리 고, 모직류도. 전처럼 구하기는 정말 힘들거에요." 그녀가 말했다. "알아." 나는 눈을 껌벅거리며 그녀를 쳐다보고 말했다. "좋은 것들은 모두 없어져 버리죠. 정말이지 그건 범죄에요. 그게 현재의 상황이구요." 그녀가 말했다. 뭐라고 내가 말한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돌아서서 머리를 숙이고 폭탄과 죽은 동물들을 찾아서 걸어간 것 같다. 12월 20일 랭비는 나치가 아니다. 공산주의자 인 것이다! 나는 손이 떨려 거 의 글을 쓸 수가 없을 지경이다. 공산주의자라니. 우리가 보초를 끝내고 내려올 때, 잡역부 한 사람이 베개에 눌려 있는 <노동자>지를 발견해서 그걸 납골당으로 가져왔다. "잔인한 공산주의자들같으니. 그들은 히틀러를 돕고 있는 거야. 왕을 욕하고, 대피소에서 난동을 부리지. 반역자들이야." 벤스-존스 노인이 말했다. "그들은 당신만큼이나 영국을 사랑해요." <노동자>지를 가지고 내려온 잡역부가 말했다. "그 놈들은 자기 자신밖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잔인하고 이 기적인 놈들. 놈들이 히틀러에게 전화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난 놀라지 않을걸," 벤스 존스가 다시 말했다. "'여보세요, 아돌프, 바로 여기에다 폭탄을 떨어뜨려요.' 라고 말 이야." 가스불 위에서 주전자가 끓었다. 잡역부는 일어나서 이빠진 찻주 전자에 뜨거운 물을 붓고 다시 앉았다.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의견을 표시한다고해서, 세인트 폴 성당 을 불태울 거라는 걸 의미하지는 안잖아요, 안그래요?" "물론 아니지요." 랭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부츠를 벗고 모직 양말을 신은 발을 잡아당겼다. "누가 세인트 폴 성당을 불태우겠어요?" "공산주의자들이지." 벤스 존스가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고, 나는 그 역시 랭비를 의심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랭비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당신이라면 그들에 대해서는 걱정을 않겠습니다. 오늘 밤 성당을 태워버리려고 온갖 짓을 다 하고 있는 건 독일놈들이란 말이 오. 지금까지 소이탄 6개가 떨어졌고, 하나는 거의 성가대석 위에 있 는 구멍까지 닿을 뻔했지." 그가 응수했다. 랭비는 찻잔을 잡역부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차를 따라주었다. 랭비를 죽이고 싶었다. 놈을 한 대 쳐서 납골당의 먼지와 부스러 기로 만들어 버리고, 벤스 존스와 그 잡역부가 그저 대책없는 놀라움 에 빠져있는 동안 나는 경고를 외치며 말이다. <도대체 공산주의자들이 한 짓이 뭔 지 알아요? 우린 그를 막아야 만 해요!>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랭비가 발을 잡아당기며 어깨에는 아직 석면 외투를 걸치고 있을 때, 나는 일어서서 랭비에게 다가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금빛으로 물 든 회랑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팔에 폭탄 꾸러미를 숨겨서 끼고 지 하철 역에서 나오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생각을 하자, 나는 죄의식과 무력감으로 엄청난 현기증과 구역질을 느꼈다. 그래서 다시 간이 침 대로 비실비실 돌아와 앉아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사람들은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심지어는 반역자라고 욕 을 해댄 벤스 존스조차도 공산주의자는 기껏해야 왕을 욕하는 정도의 행동 밖에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몰라. 알리 가 없지. 공산주의자들의 실체가 앞으로 어떨지를. 스탈린은 샛길일 뿐이야. 공산주의는 러시아를 의미해. 그들은 카린스키나 신 러시아 나 기타 <공산주의자>라는 말이 <괴물>처럼 들리게 만들 그 어떤 것 도 들어본 일이 없다.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을 거야. 공산주의자 들이 목적을 이루었을땐 화재감시원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 무렇지도 않게 말해진 <공산주의자>라는 말이 여기 세인트 폴 성당에 서는 무얼 의미하는 지를 아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 밖에 없는 것이 다. 공산주의자. 그걸 알아야 했었는데.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12월 22일 다시 이중 화재감시 체제로 들어갔다. 한 잠도 못 잤고, 걸음도 점점 더 비틀거리게 되었다. 오늘 아침에는 하마터면 지붕 위의 문제 의 구멍 속으로 빠질 뻔했는데, 무릎을 꿇어 주저앉는 바람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내 몸의 엔돌핀 농도가 거칠게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었고, 잠을 좀 자 두지 않으면 곧 랭비가 말하던 걸어다니는 산송 장 꼴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랭비를 지붕 위에, 성당 안에, 혹은 어느 곳에든 그냥 두고 떠난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심 지어 랭비가 잘 때에도 감시를 해왔었다. 인공 약물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컨디션이 좋지 않긴 해도 정 신집중을 유도해낼 수 있을텐데. 그렇지만 나는 선술집으로 나갈 수 조차 없었다. 랭비가 기회를 기다리면서 계속해서 지붕위에 있는 것 이다. 에놀라가 다시 온다면 나는 그녀에게 브랜디를 구해다 달라고 분명히 말을 해야겠다. 며칠 남지 않은 것이다. 12월 28일 오늘 아침, 서쪽 현관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어올리고 있을 때 에 에놀라가 찾아왔다. 그 나무는 3일 밤을 계속되었던 폭격의 진동 때문에 쓰러졌다. 에놀라가 쾌활한 성자처럼 안개 속에서 갑자기 모 습을 드러냈을 때, 마침 나는 나무를 바로잡아주고 나서 장식을 집으 려고 몸을 굽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굽히고 나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끈질긴 감기 때문에 코가 빨개진 모습의 그녀는 나에 게 색지로 포장된 상자를 건네 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녀가 말했다. "풀어보세요. 선물이에요." 내 눈치는 어디론가 산책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상자가 브랜 디 한 병을 넣기에는 너무 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나는 그녀가 내 부탁을 기억하고, 나의 구세주를 가져 온 것이 라고 믿었다. "내 사랑," 나는 이렇게 말하고 선물을 뜯었다. 목도리였다. 회색 모직의 목도리. 한 30초 쯤를 나는 멍하니 그걸 쳐다보고 있었다. "브랜디는 어디 있어?" 내가 물었다. 그녀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코가 더 빨개지고, 눈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당신에겐 이게 더 필요해요. 의류배급표도 없는데 항상 옥외에 있어야 하잖아요. 날씨는 지독하게 춥다구요." "난 브랜디가 필요했어," 내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단지 당신을 위해서, 애써서......" "날 위해서라구? 브랜디를 구해달라고 했잖아. 목도리가 필요하다 고는 한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나는 그걸 다시 그녀에게 밀어버리고 나무가 쓰러질 때 깨어진 색 전등이 매달린 전선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에놀라에게 키브린에게서 보이던 그 놀라운 순교자같은 표정이 나 타났다. "난 당신이 이 위에 있는 동안 내내 걱정을 해요." 그녀가 흥분해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아시다시피 세인트 폴 성당을 노리고 있어요. 그리고 여 긴 강에서 너무나 가까워요. 난 당신이 술을 마셔야 한다고는 생각하 지 않았어요. 난......, 봐요, 그들이 우리 모두를 죽이려고 이렇게 열심일 때에 당신이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다는 건 죄악이라고요. 그 건 당신이 그들과 한패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언제고 내가 세인 트 폴 성당으로 올라왔을 때에 당신이 여기 없을까봐 걱정이 돼요." "좋아, 그럼 내가 목도리로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그들이 폭탄 을 떨어뜨릴 때에 머리 위에 두르고 있기라도 할까?" 에놀라는 돌아서 뛰어가 버렸다. 그녀는 두 계단도 채 내려가기 전에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깨진 전등이 달린 줄을 들고 나는 그 녀를 쫓아갔고, 줄에 발이 걸려 계단에서 거의 바닥까지 넘어져 굴렀 다. 랭비가 나를 일으켰다. "화재감시를 쉬어야 겠군."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아니, 그럴 수 있지. 난 걸어다니는 시체하고 같이 지붕에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랭비가 날 납골당까지 데려와서, 차를 타 주고, 침대에 날 눕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아주 걱정하는 것 처럼 보였다. 내가 쓰러지길 기다려 왔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경보가 울릴 때까지만 난 여기 누워있을 것이다. 일단 지붕으로 가면 주위의 의심을 사지 않고서는 나를 돌려보낼 수 없겠지. 석면 외투와 고무 장화를 신은 그 헌신적인 화재감시원이라는 작자가 떠나기 전에 뭐라고 했는지 여 러분은 짐작이나 하실런지. "당신은 잠을 좀 자 두어야 겠군." 어찌 내가 랭비를 지붕 위에 두고 잠을 이룰 수 있겠는가. 잠을 잔다면 난 산 채로 불에 타 죽을 것이다. 12월 30일 사이렌 소리에 잠을 깨니 벤스 존스 노인이 말했다. "좀 자둔게 도움이 되었을걸세. 꼬박 한나절을 잤는걸." "오늘이 몇 일인가요?" 신발을 신으려 달려들며 물었다. "29일." 그가 말했다. 내가 문으로 뛰쳐나갈 때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서두를 것 없어. 오늘은 늦게나 공습이 있을거야. 아예 없든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구 말구. 지금은 썰물이라 강에 물도 없는데." 나는 계단으로 가는 문 옆에서 차가운 묘비를 붙들고 멈춰섰다. "세인트 폴 성당은 무사한가요?" "아직 잘 버티고 있지, 왜, 나쁜 꿈이라도 꾸었나?" "네." 지난 몇 주간의 악몽들을 떠올리며 대답을 했다. <세인트 존의 숲>에서 내 팔에 안겨있던 죽은 고양이, <노동자> 신문과 고성능 폭 탄을 팔에 낀 랭비, 예수의 등불 아래 번쩍거리는 화재감시원들의 추 모비. 순간 나는 그냥 꿈만 꾼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렇게도 바랬던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그런 종류의 잠을 잤던 것이다. 그래서 기억이 났다. 공산주의자들이 완전히 태워버린 것은 세인 트 폴 성당이 아니었다. 일간 신문의 머릿기사. <마블 아치>역에 폭 격, 이로 인해 18명 사망. 연도만 기억날 뿐 날짜는 확실히 떠오르지 않았다.1940년. 1940년은 이제 정확히 이틀 남아있었다. 나는 석면 외투와 목도리를 움켜 쥐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 대리석 바닥을 가로 질러 뛰었다. "대체 어딜 그리 미친듯이 가는 거요?" 랭비가 소리쳤다. 그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에놀라를 구해야 합니다. <마블 아치>역이 폭격당할거란 말입니 다." 내 목소리가 어두운 성당 안에 울려퍼졌다. "지금 떠나선 안돼." 랭비가 내 뒤에서 외쳤다. 그는 후에 화재감시원 추모비가 세워질 장소에 서있었다. "강에 물이 없어. 공습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망할 ----" 나머지 말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미 계단 아래로 뛰어내려가 택시에 올라 타고 있었다. <세인트 존의 숲>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렇 게도 소중하게 간직해 두었던 돈을 거의 다 쓰게 되었다. 택시가 아 직 옥스포드 거리를 달리고 있을때 폭격이 시작되었고, 택시 기사는 더 이상 가지 않으려 했다. 나는 차에서 쫓겨나 칠흑같은 어둠 속에 남겨졌고, 절대로 제때에 <마블 아치>역에 도착할 수 없다는 걸 깨달 았다. 쾅! 에놀라가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쓰러져 쳐박힌다. 그녀는 발가락이 드러나는 신발을 신고 있고, 몸엔 상처 하나 없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 올릴 때 피부 밑에 느껴질 끈적한 것. 나는 에 놀라를 그녀가 내게 선물한 목도리로 감싸야 주어야 할 것이다. 내가 너무 늦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제대로 구해내지도 못하는 꼴이 되 려고 백년 씩이나 과거로 날아온 게 될 것이다. 나는 대공포가 설치된 하이드 파크를 보고 길을 찾아 마지막 블럭 을 뛰어 갔다. 그리고 <마블 아치>역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미끄러 져 내려갔다. 매표구의 여자가 내 마지막 돈을 다 챙겨갔다. 나는 표를 주머니 에 찔러넣고 계단을 향해 뛰었다 "뛰지 말아요. 왼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표 파는 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른쪽으로 난 금속제 문은 닫혀서 쇠사슬이 감겨 있었고, 그 앞 은 나무 바리케이트로 막혀 있었다. 행선지가 적힌 표지판에는 테이 프로 가위표가 그려져 있었고 '열차 타는 곳' 이라고 적힌 새 팻말이 왼쪽을 가리키며 바리케이트 위에 붙어 있었다. 에놀라는 멈춰진 에스컬레이터나 통로의 벽에 기대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없었다. 나는 1번 계단으로 갔지만 그곳을 통과할 수가 없었 다. 통로를 어떤 가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배급품인 차와 빵, 버터, 왁스바른 종이로 밀봉된 잼 용기, 랭비와 내가 기와 조각 사이에서 찾아낸 것처럼 생긴 고리 위의 남비 하나,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이 죄다 가장자리가 꽃무늬로 장식된 천 위에 널려 있었다. 나는 계단을 따라 폭포수처럼 널린 차 봉지 더미를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난, <마블아치> 역은......" 날아온 파편에 맞아 20명이 더 사망. "당신들은 어서 여기서 떠나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우린 여기 있을 권리가 있소. 딴데로 옮기라고 그러는 당신은 대 체 누구요?" 남자가 호전적으로 말했다. 마분지 상자에서 접시를 꺼내고 있던 여자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남비가 끓기 시작했다. "당신이나 딴 곳으로 가시오. 가란 말이오!" 그 남자가 말했다. 그는 내가 지나가도록 한쪽으로 비켜섰다. 나는 미안한 몸짓으로 천 가장자리를 지나갔다. "죄송합니다. 전 플랫폼에서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보쇼. 절대 찾을 수 없을 거요. 저 안은 지옥이라구." 사내가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남자 옆을 서둘러 지나가다 가 찾잔이 놓여진 바닥의 식탁보를 밟을 뻔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 아서 지옥으로 들어갔다. 지옥은 아니었다. 가게의 여점원들이 외투를 여미고 서로 기대어 있었다. 활기차거나 혹은 우울하거나, 못마땅한 기색이긴 했어도 저 주받을 것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두 꼬마가 동전 하나를 놓고 싸우 다가 선로에 떨어뜨려 잃어버렸다. 꼬마들은 주우러 갈까 말까 다투 면서 선로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역무원이 그들을 보고 뒤로 물러나라고 소리쳤다. 열차가 승객들을 가득 실은 채로 왔다. 모기 한 마리가 손에 앉은 것을 보고 역무원이 그걸 잡으려다가 놓쳤다. 꼬마들은 웃었다. 그들의 앞에도, 뒤에도, 마치 터널의 위험한 타일 로 덮힌 곡선 터널을 따라 사방으로 사람들이 재앙처럼 늘어서 있었 고, 입구와 계단위에도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수백, 수천의 사람들 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계단 위로 다시 올라가다가 찻잔을 넘어뜨렸다. 차가 쏟아져서 천 위로 온통 흘렀다. "이보쇼, 내가 말했잖소." 아까의 사내가 즐거운듯 떠벌였다. "거기는 지옥이라니깐. 그렇죠? 저 아래는 더 심하지." "지옥, 그렇군요." 내가 말했다. 에놀라를 찾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리라. 결코 그녀를 구해내지도 못할 거야. 나는 쏟아진 차를 걸레로 훔쳐내고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 다. 이 여자도 역시 구할 수 없어. 에놀라도, 고양이도, 다른 누구도 이 끝없는 계단, 끝 없는 시간의 막다른 골목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다. 그들은 이미 100년 전에 죽어버린 것이다. 과거는 보존된다. 과 거는 단순한 보존을 초월한 그 무엇이다. 바로 이것이 역사학부에서 나를 이곳에 보내 배우게 하려던 점이었다. 그래, 좋아. 이젠 알겠어 . 그러니 이젠 집에 갈 수 있는 걸까? 당연히 아니지, 얼간아. 바보같이 이미 택시비와 브랜디 값으로 가진 돈을 다 써버렸고, 게다가 오늘 밤이 바로 독일군의 대공습으로 <시티>가 불타버리는 날이 아닌가. (너무 늦게서야 모든 기억이 떠올 랐다. 성당 지붕 위에는 28개의 소이탄이 떨어질 것이다) 랭비는 성 당에 불을 지를 기회를 포착할 것이고, 이 멍청이 바솔로뮤는 가장 쓴 교훈, 처음부터 알아야했던 바로 그 교훈을 배워야만 하는 것이 다. 성당이 불타는 건 막을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을. 나는 플렛폼 위로 돌아가 열차가 정차할 때까지 노란 안전선 뒤에 서 있었다. 나는 차표를 꺼냈고, 세인트 폴 역에 도착할 때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거기에 도착했을땐 연기가 마치 물이 퍼부어지듯 내게 굽이처 몰려왔다. 세인트 폴 성당을 볼 수가 없었다. "썰물이라 강에 물이 없어요." 한 여자가 절망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는 천으로 된 긴 소화용 호스들 사이로 걸어 내려갔다. 내 손은 고약한 냄새가 진흙으로 뒤덮 였고, 나는 마침내(너무나 늦게) 조수 간만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불 을 끌 물이 없는 것이다. 경찰관 한명이 내 앞을 막아섰고, 나는 뭐라 말할지 모른채 멍하 니 서있었다. "민간인 통제구역입니다. 성당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연기가 불꽃을 튀겨대면서 먹구름처럼 소용돌이 쳤다. 그리고 성 당의 돔이 그 위로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전 화재감시원입니다." 이말을 하자 나를 보내줬고, 나는 성당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내 엔돌핀 농도는 분명히 공습경보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요동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난 그때, 앞뒤가 맞지 않는 기억속의 그 순간들 말고는 어떤 단기기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가 랭비를 데 리고 내려왔을 때 이일 저일을 도우면서 구석에 모여들던 사람들. 돔 안에서 불타는 나무조각들의 소용돌이, 화상을 입은 내 손에 연고를 발라주던, 에놀라처럼 발가락이 드러나는 신발을 신고 있던 구급차 운전수. 그런 기억 한 가운데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내가 로프로 랭비를 따라가서 그의 목숨을 구한 순간이다. 나는 연기 때문에 눈을 깜박거리며 돔 곁에 서 있었다. <시티> 전체가 불타고 있었고, 마치 세인트 폴 성당은 열에 달구어져 녹아버릴 듯, 아니 소음만으로도 성 당이 무너져버릴 듯 보였다. 벤스 존스 노인은 북서쪽 탑 근처에서 삽으로 소이탄을 두들기고 있었다. 폭탄이 전에 나무로 때워 놓았던 그 자리를 뚫고 들어갔고, 그 바로 옆에서 랭비는 나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소이탄 하나가 랭비 뒤에서 달가닥 거렸다. 나는 삽을 집으 려 돌아섰고, 다시 돌아보니 랭비는 보이지 않았다. "랭비!" 소리를 쳤지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갈라진 틈으로 떨어져 버렸고 아무도 소이탄이나 그를 보지 못했다. 나만 빼고는. 어떻게 그 지붕을 건너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줄을 달라고 했 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줄을 손에 넣었다. 줄의 한쪽 끝을 허리에 묶고 다른 한쪽 끝은 다른 화재감시원의 손에 쥐어준 후 가장자리로 넘어갔다. 바닥까지 가는 동안 내내 불이 구멍 안의 벽을 비추었다. 아래쪽으로 희끄무레한 깨진 돌조각 더미가 보였다. 랭비가 저 아래 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벽으로 부터 떨어져 뛰어내렸다. 내려간 장 소는 너무 좁아서 돌조각들을 던져버릴 곳이 없었다. 나는 혹시라도 실수로 랭비에게 돌을 던지게 될까봐 널빤지와 석고조각들을 내 어깨 뒤쪽으로 던지려 노력했지만 몸을 틀 공간조차 넉넉하지는 않았다. 잠시 나는 랭비가 여기에 있지 않고, 부서진 나무조각들을 치우고 나 면 납골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맨바닥만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랭비의 위를 밟고 다니며 괴롭히고 있단 생각을 하니 온 몸 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나는 그의 무력한 몸을 밟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 때 랭비의 손이 유령처럼 나타나서 내 발목을 붙잡았다. 나는 서둘러 피했고, 그러자 그의 머 리가 내 몸무게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랭비는 더 이상 나를 겁주지 못하는 시체처럼 핼쑥한 모습이었다. "내가 폭탄을 제거했소." 그가 말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고, 안도감에 사로잡혀 말이 나오 지 않았다. 그 병적으로 흥분한 한 순간 나는 심지어 웃기가지 한 것 같다. 난 그를 보는게 기뻤다. 얼마후 내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 지 생각이 났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물었다. "물론," 그는 이말을 하고 한쪽 팔꿈치로 일어나려 했다. "자네에겐 참 안된 일이겠지만."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자기 무게를 오른쪽에 실어 돌조각들 이 거칠게 깔린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우며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냈 다. 나는 그의 상처를 알아보기 위해 부드럽게 그를 들어올리려 했다. 그는 어떤 물건 위에 떨어졌던 것이 틀림없었다. "소용 없어. 내가 이미 소이탄을 껐다구." 그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는 그가 일시적인 정신착란에 빠질까 두려워서 놀란 내 눈빛을 그에게 보이지 않고, 그를 다시 반대쪽 편으로 돌려 눕혔다. "난 당신이 이 폭탄 하나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 그는 전혀 저항하지 않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조만간 어느 지붕에서든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았소. 단지 나만이 그걸 감시했지. 이제 당신 동료들에게 뭐라고 말할 건가?" 그의 석면 방화복은 등 아래쪽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그 안쪽의 등은 까맣게 탔고 연기가 나고 있었다. 소이탄 바로 위에 떨어진 것 이었다. "맙소사," 나는 그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화상이 얼마나 심한 지 알아보기 위 해 미친듯 애썼다. 그 화상이 얼마나 심한지 알 도리는 없었지만 최 소한 옷이 찢어진 부분의 좁은 폭보다 넓게 퍼지지는 않은 것 같았 다. 그의 밑에서 폭탄을 꺼내보려 했지만 난로를 직접 만지는 것만큼 이나 뜨거웠다. 그런데도 폭탄은 녹지 않고 있었다. 내가 넣어둔 모 래와 랭비의 몸이 그걸 누르고 있었다. 폭탄이 공기에 노출되면 다시 발화할지 어떤 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랭비가 떨어지면서 떨어뜨렸 을 양동이와 소화용 손펌프를 두리번 거리며 찾았다. "무기를 찾고 있나?" 랭비가 도대체 다친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 로 또렷하게 말했다. "왜 나를 그냥 내 버려두지 않는 건가? 약간만 노출시켜 놓으면 아침 쯤 죽어있을텐데. 아니면 자네의 그 더러운 일을 몰래 하려는 건가?" 나는 일어서서 위의 지붕에 있는 사람에게 고함을 쳤다. 그 중 한 사람이 손전등을 우리에게 비추었지만 불빛은 우리가 있는 곳까지 닿 지 않았다. "죽었나요?" 누군가가 소리쳤다. "구급차를 불러줘요, 그는 화상을 입었어요." 내가 말했다. 나는 상처를 다치지 않고 등을 받쳐주려고 애쓰며 랭비가 위로 올 라가는 것을 도왔다. 그는 약간 비틀거리더니 벽에 기대어, 내가 벽 조각을 삽으로 써서 소이탄을 묻으려 애쓰는 것을 보았다. 줄이 내려 오자 나는 랭비를 줄에 묶었다. 내가 랭비를 올라가게 도와주는 동안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계속 나를 바라보면서 내 가 그의 허리에 줄을 묶도록 내버려 두었다. "네가 납골당에서 질식하도록 내버려두었어야 했어." 그가 말했다 그는 나무로 된 지지대에 편안하게 기대어 서 있었고, 긴장이 풀 어진 채로 손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랭비의 손을 느슨한 줄 위에 올려 놓고 그에게 손힘이 남아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줄을 한번 손에 감아주었다. "화랑에 있었던 그 날 이후로 계속 널 주시하고 있었어. 난 네가 고소공포증 따위는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 내가 너의 그 귀중한 계획을 망쳤다는 생각이 드니까, 넌 높은 곳을 전혀 겁내지 않고 여기까지 내려왔어. 도대체 왜 그랬지? 양심의 가책이었나? 거 기에 아기처럼 무릎을 대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한 거지? 무슨 일을 한 거야?'라고 흐느끼면서 넌 나를 역겹게 만들었어. 하지만 무엇이 네 정체를 가장 먼저 드러냈는지 아나? 고양이야. 누구든지 고양이가 물을 싫어한다는 건 다 알아. 더러운 나치 스파이놈만 빼 놓고는 누 구나." 줄에 한 번 신호가 왔다. "계속 당겨요." 내가 말하자 줄이 팽팽해졌다. "WVS의 매춘부든가? 그 여자도 첩자였나? 아마도 <마블 아치>역에 서 너와 만나기로 했었겠지? 나에겐 그 곳이 폭격당할 거라고 말하면 서 말이야. 넌 썩어빠진 첩자야, 바솔로뮤. 네 동료들은 이미 9월에 거길 날려버렸다고. 그건 다시 개통한 거야." 줄이 갑자기 움직여 랭비를 끌어올렸다. 그는 줄을 좀더 잘 잡기 위해 손을 비틀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가 벽에 긁혔다. 나는 손을 들 어서 그를 부드럽게 밀어 왼쪽이 벽에 닿도록 해 주었다. "넌 큰 실수를 하고있는 거야. 그건 너도 알겠지, 넌 나를 죽여야 만 했어. 난 다 말해버릴 거야." 그가 말했다. 나는 줄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지붕 위에 도착했을 때 랭비는 의식불명이었다. 나는 화재감시원들을 지나쳐 돔 으로 가서 다시 납골당으로 내려갔다. 오늘 아침, 삼촌으로부터 편지가 왔고, 그 안에는 5파운드의 돈이 들어있었다. 12월 31일 던워디 선생의 조교 둘이 내게 시험에 늦었다고 말하며 <세인트 존의 숲>에 와있었다. 나는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걸어다니는 시체 에게 시험을 보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도 생각지 못한 채 순순히 끌려갔다. 그 동안 난 한잠도 못 잤다. 얼마 동안이나 못 잔거지? 어제 에놀라를 찾으러 갔던 때부터니깐, 백 년을 못 잔 셈이 되는 군. 던워디 선생은 평가관에서 눈을 껌벅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교들 중 하나가 시험지를 건네주었고 다른 한 사람이 시험 시간을 알려주었다. 시험지를 뒤집었더니, 화상에 바른 연고가 묻어 시험지에 얼룩이 남았다. 나는 얼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랭 비를 뒤집을 때는 손바닥으로 소이탄을 잡았었는데 화상은 손등에 나 있다. 갑자기 랭비의 고집 센 목소리로 대답이 들려왔다. "그건 줄에 대인 상처잖아. 이 바보같은 작자야. 나치에서는 첩자 들에게 줄타고 오르는 법도 안가르치나?" 나는 시험지를 내려다보았다. 문제를 읽었다. "세인트 폴 성당에 떨어진 소이탄의 갯수는? _____, 지뢰의 갯수 는? _____, 고성능 폭탄의 갯수는? _____, 소이탄을 제거하는 데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방법은? _____ , 지뢰의 경우에는? _____, 처음 화재감시에 올라갔던 자원자의 수는? _____,두번째에는? _____, 부상자의 수는? _____, 사망자의 수는? _____" 말도 안되는 문제들이었다. 문항마다 고작 숫자나 간신히 쓸 여백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소이탄을 제거하는 데에 가장 보편적으로 쓰 인 방법. 도대체 그걸 어떻게 그 좁은 여백에 다 쓰란 말인가? 에놀 라와 랭비와 고양이에 관한 질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난 던워디 선생의 책상으로 갔다. "세인트 폴 성당이 어제 거의 불타 버렸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문제들은 어떻게 된거죠?" 내가 물었다. "바솔로뮤군, 자네는 문제에 답을 써는 사람이지, 질문을 하라고 앉아 있는 게 아닐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는 질문이 하나도 없잖습니까." 내가 따졌다. 내 분노를 누르고 있던 외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 다. "물론 그런 것에 관한 질문도 있네,: 던워디 선생이 문제지의 두번째 장을 툭 치며 말했다. "1940년에 있었던 부상자의 수. 폭파에 의한 경우, 파편에 의한 경우, 기타 등등" "기타라고요?" 내가 반문했다. 석고 조각을 맹렬히 퍼부으며 납골당의 지붕이 내게 무너져 내리 기도 하지 않았던가. "기타라고요? 랭비는 자기 몸으로 소이탄을 껐습니다. 에놀라는 점점 상태가 나빠지는 감기를 앓고 있었구요. 고양이는......" 나는 시험지를 잡아채서 "폭파에 의한 경우" 의 뒷부분에 있는 공 간에 "고양이 한 마리" 라고 갈겨썼다. "당신은 그런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란 겁니까?" "통계학적인 관점에서는 아주 중요하다네, 하지만 제각각으로는 역사의 큰 흐름과 거의 관계가 없지." 그가 말했다. 반사적으로 나는 한방 갈겨버렸다. 던워디 선생의 반사신경이 그 토록 느린게 내겐 의외였다. 내 주먹은 그의 턱 옆을 스쳐 안경을 떨 어뜨렸다. "당연히 관계가 있어! 그들이 바로 역사 그 자체란 말이야. 역사 는 빌어먹을 숫자가 아니라구." 내가 소리쳤다. 조교들의 반응은 매우 빨랐다. 그들은 내가 던워디에게 또 한방 날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내 양 팔을 잡아 밖으로 끌어내 버렸 다. "그들은 과거의 저 뒤편에서 구해줄 사람도 없이 방치되어 있어. 코앞에 있는 손도 볼 수 없고, 머리 위로는 폭탄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건 중요하지 않다구? 그런게 역사가라고 말하는 거야?" 조교들은 나를 질질 끌고 문 밖으로 나와 현관까지 갔다. "랭비는 세인트 폴 성당을 구했어. 한 인간이 그 보다 더 중요한 걸 해낼 수 있을 것 같애? 당신은 역사가도 아냐! 당신은 고 작......" 나는 던워디 선생에게 최악의 욕을 해주고 싶었는데, 고작 내가 한 소리란게 랭비가 한 말이었다. "당신은 더러운 나치 첩자에 불과해!" 나는 크게 욕을 해 댔다. "당신은 게으른 부르조아 타르트란 말야!" 조교들은 내 손과 무릎을 잡고 문 밖으로 내팽개친 후 면전에서 문을 탁 닫아버렸다. "돈을 주고 하래도 역사가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나는 이렇게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댄 뒤, 화재 감시원들의 추모 비를 보러 갔다. 나는 이 기록을 조금씩 써가야 할 상황이다. 손의 상태가 아주 좋 지 않다. 던워디씨의 똘마니들은 별로 사정을 봐주지 않았던 것이다. 키브린은 성녀 잔다크 같은 옷차림을 하고서 정기적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내 손에 연고를 너무 많이 발라댔기 때문에 연필도 제대로 잡 을 수가 없다. 세인트 폴 성당 역은 물론 지금은 없다. 그래서 나는 홀본 역에 내려서 도시가 불타버린 다음 날 마지막으로 매튜스 대사제를 만났을 때를 생각하며 거리를 걸었다. 그건 오늘 아침이었다. "당신이 랭비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 둘이서 지난 밤 세인트 폴 성당을 구했지요." 그가 말했다. 나는 대사제에게 삼촌으로부터 온 편지를 보였고 그는 그게 무언 지를 알지 못하겠다는 듯 편지를 쳐다보았다.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 끔찍한 순간 나는 랭비가 죽었다고 말하려는 것이리라 생각했 다. "우리는 히틀러가 다른 무언가를 폭격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기 전 까지는 계속 세인트 폴 성당을 지켜야 할 겁니다." 나는 런던 공습은 거의 끝났습니다, 라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 다. 히틀러는 몇 주 안에 교외 쪽을 폭격하기 시작할 겁니다. 캔터베 리, <바쓰> 같은, 역시 대성당들을 노리구요. 당신과 세인트 폴 성당 은 전쟁이 끝나서 화재 감시원들의 추모비를 헌정할 때까지 꿋꿋히 살아남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가장 어려운 고비는 지나간거라구요." 매튜스 대사제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제님," 나는 지금까지도 거기 새겨진 글짜를 읽을 수 있는 화재 감시원 기념비를 생각해 냈다. 아뇨, 사제님, 가장 어려운 고비는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루드게이트 언덕> 꼭대기에 올라갈 때까지는 가까스로 이성 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곧 공동묘지에 간 사람처럼 마구 헤메 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그 파편들이 마치 랭비가 나를 파내려 애썼 던 그 석고조각처럼 보인다는 건 기억하지 못했었다. 나는 추모비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나는 추모비 위에 걸려 넘어졌고, 마치 시 체라도 밟은 듯 펄쩍 뒤로 물러났다. 그것이 남아 있는 전부였다. 히로시마에는 피폭 지점에 한줌의 온 전한 나무라도 남아 있었을 것이다. 또 덴버에는 국회의사당 계단이 남아있다. 그러나 어떤 곳에 있는 그 어떤 잔재도, "신의 은총으로 대성당을 구해 낸 세인트 폴 성당의 남녀 화재 감시원들을 기억하 라." 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오, 신의 은총. 추모비의 일부는 닳아 없어졌다. 역사학자들은 거기에 "영원히" 라는 문장이 한 줄이 더 새겨져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난 믿지 않는다 혹, 매튜스 대사제가 그 문구에 전혀 관련이 없다면 몰라도 말이 다. 또 추모비가 바쳐진 어떤 감시원도 그 말을 잠시라도 믿지는 않 을 것이다. 우리는 떨어진 소이탄 하나를 끌 때마다 고작 다음 소이 탄이 떨어질 때까지만 성당을 구해내는 셈이었다. 위험 지점에서 항 상 감시하며, 작은 불은 모래와 소화용 손펌프로, 큰 화재는 온 몸으 로, 그 거대하고 복잡한 건물을 떨어지는 폭탄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이런 이런. 이렇게 말하니 마치 401 역사 실 습 과정의 보고서처럼 들린다. 파괴주의자들이 고성능 폭탄을 던져넣 는 것만큼이나 쉽게 역사가가 될 기회를 던져버리고 나니, 역사가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배울 얼마나 좋은 기회가 생긴 것인가! 아뇨, 사제님, 가장 어려운 고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념비에는 플레쉬 번 {{ Flash Burn, 핵폭발 시 폭발 섬광에 타서 생긴 흔적 }} 이 있었다. 전설에서는 세인트 폴의 대사 제가 핵폭발이 나기전 그 자리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대 체 출처가 의심스러운 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정문은 전혀 기도하 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건 아마 윈드밀 극장이 어디있는 지를 물어보러온 여행자의 그림자거나, 자원자에게 목도리를 갖다주 던 아가씨의 모습이 찍힌 것이리라. 아니면 고양이였든지.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매튜스 대사제님, 전 첫째날 서쪽 문을 통해 어둠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에 이미 그걸 알았죠. 하지만, 그랬더라도 이건 너무 슬픕니다. 랭비가 날 나 찌 스파이라고 생각하면서 죽었고, 내가 없었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에놀라가 어느 날 찾아왔는 데, 거기엔 접는 의자도 친구도 없고 파 낼 수 없을 정도로 파편만이 무릎 높이까지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된 다는 것이 너무나 견디기 힘듭니다. 아냐, 최악은 아니야. 그들은 모두 죽었지. 매튜스 대사제까지도. 그러나 그들은 내내 나만이 알았던 이 사실을 모른채 죽었다. 왜 내 가 <속삭임의 회랑>에서 주저 않아, 슬픔과 죄의식으로 토할 것 같았 는지를 말이다. 결국에는 우리 모두다 세인트 폴 성당을 구해내지 못 했다는 사실이 남았다. 게다가 랭비는 죽었으니, 상심하여 아연실색 한 얼굴로 내게 이렇게 물을 수도 없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한거야? 자네 일당인 나찌들이 그랬나?" 만약 랭비가 그리 물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아니, 공산주의자들이 그랬죠." 이게 최악이었을 것이다. 나는 방으로 돌아왔고, 키브린이 손에 연고를 더 바르게 내버려두 었다. 그녀는 내가 잠을 좀 자기를 바란다. 나는 짐을 싸서 떠나버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이 와서 나를 집어 내던지도록 내버려 두 는 것은 너무 굴욕적인 일이다. 하지만 나는 키브린과 옥신각신할 힘 이 없다. 그녀는 에놀라와 너무 닮았다. 1월 1일 나는 밤 동안은 물론 아침에 우편물이 올 때까지 내내 잠을 잤다. 내가 잠을 깨자마자 키브린이 봉투를 들고 침대 한 끝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네 학점이 나왔어." 그녀가 말했다. 나는 팔로 눈을 가렸다. "그치들은 필요할 때에는 놀랄 정도로 동작이 빠르군 그래. 안그 러니?" "맞아," 키브린이 말했다. "어쨌든 좀 보자. 언제 날 내쫓을 거래?" 내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컴퓨터로 찍은 얄팍한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나 는 선을 따라 그걸 찢었다. "잠깐, 열기 전에, 할 말이 있어."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손으로 부드럽게 내 상처를 감싸 쥐었다. "역사학부에 대한 네 생각은 틀렸어. 그들은 훌륭해." 그건 확실히 내가 그녀에게 듣기를 바라던 종류의 말은 아니었다. "<훌륭하다>라는 건 내가 던워디 선생을 묘사할때 쓰는 말은 아니 군." 나는 이렇게 말하고, 안에 든 쪽지를 꺼냈다. 쪽지가 무릎 위에 펼쳐져 있으므로 내용이 보일텐데도 키브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좋아. 뭐라고 써있나 보자." 내가 말했다. 종이에는 고명하신 던워디 선생이 친필 서명을 해 놓았다. 1 등급이었다. 최우수 성적. 1월 2일 오늘 우편으로 두 가지가 날아왔다. 하나는 키브린의 과제였다. 역사학부는 정말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다. 나를 간호하기 위해 키브 린을 충분히 오랫동안 여기 남아있게 해준 데다가, 심지어 조교들을 보내 화재에 대한 시험까지 치르게 해주었다. 나는 실습으로 겪은 일들이 모두 역사학부에서 꾸민 일이라고 믿 고싶어 했던 것 같다. 에놀라와 랭비는 단지 고용된 배우에 불과하 고, 고양이는 시한 장치가 들어 있는 똑똑한 안드로이드였는 데 최종 효과를 더해 주기 위해 제거되었다고. 그건 던워디 선생이 훌륭하지 않다고 믿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이 떠나지 않는 고통이 싫어서였다. "네 실습은 1400년의 영국이었다고 했지?" 전에 내가 랭비를 볼때 같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며 내가 물었다. "1349년이었어," 라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기억에 잠겨 흐려졌다. "흑사병이 돌던 해였지." "맙소사,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흑사병은 위험등급 10이잖아." "난 선천적으로 면역이 되어있어," 그녀가 말하며 자기 손을 내려다 보았다. 아무런 할 말을 찾을 수 없어서 나는 그냥 또 한장의 편지를 개봉 해 보았다. 그것은 에놀라에 관한 보고서였다. 컴퓨터로 찍힌, 사실 과 날짜와 통게들이었다. 모든 것이 역사학부가 그렇게도 사랑해 마 지않는 숫자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내가 모르고는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실들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독감에서 회복했고, 대공습에서도 살아남았다. 어린 톰은 <바쓰>에서 있었던 배데이커 공습에서 죽었지만, 에놀라는 공산주의 자들이 핵폭탄으로 세인트 폴 성당을 완전히 날려버리기 전해인 2006 년까지 살았다. 내가 그 보고서를 믿는지 안 믿는지는 나 자신조차 알 수 없었지 만, 그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건 랭비가 그 노인에게 글을 큰 목소리로 읽어주었던 것처럼 인간애의 조그만 표현에 지나지 않았 다. 역사학부는 모든 것을 다 염두에 두고 있다. 하긴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나에게 랭비가 어떻게 되 었는 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그가 바로 다음날 병원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크게 문 제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역사학부가 내게 가르치려 했던 그 모든 쓰디쓴 교훈들에도 불구하고 이 한 마디만큼은 믿을 수 없다. 아무 것도 영원히 남지는 않는다는 것. 내게 랭비는 영원히 남을 것 같다. 1월 3일 오늘 던워디 선생을 만나러 갔다.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인지는 모 르겠다. 역사의 화재 감시원으로 자원해서 인간의 마음에 떨어지는 소이탄을 조용하고 경건하게 감시하겠다는 거만하고 바보같은 소리였 던가? 하지만 그는 시력이 나쁜 사람이 늘 그렇듯이 눈을 깜박이며 책상 너머로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그는 세인트 폴 성당이 완전 히 없어져 버리기 전에 햇빛 아래 드러난 마지막 밝은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과거가 보존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래서 난 대신에 이렇게 말하고 말았 다. "안경을 깨뜨려서 죄송합니다, 교수님." "세인트 폴 성당이 마음에 들었나?" 나는 마치 에놀라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눈 앞의 사람을 잘못 이 해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그는 상실감을 느낀게 아니라 뭔가 다 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세인트 폴 성당을 사랑했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다네." 그가 말했다. 결국 매튜스 대사제가 틀렸다. 나는 온 실습 기간 내내 떠오르지 않는 기억과 싸웠으나 결과적으로 나의 적은 기억이 아니었다. 그리 고 역사가가 되는 것은 성스러운 짐을 지는 일과는 관련이 없었다. 던워디 선생은 어제 아침의 덧없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 아니 었다. 왜냐하면 그는 실습 첫날 오후의 어두침침한 어둠속을, 세인트 폴 성당의 큰 서쪽 문 안을, 랭비나 다른 모든 것들처럼,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모든 순간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