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훈 sf작가 구보씨는 오늘 새삼 현대의 물결에 동참이라도 하듯 20세 기의 표준정장을 하고 문간을 나섰다. 별볼일 없는 sf작가라는 직함으로 힘겨운 세상의 한모퉁이에 발하나라도 밀어넣자니 힘이 버거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문학입네,시대의 조류를 종 으로 꽤뚫네 하며 자존심을 부려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 쩐지 며칠전부터 외도를 한 탓인지- ..의 현실인식,혹은 자본사 회의 현실인식에..,현실과 내집장만..등등의 현실시리즈를 탐독 한 것- 불현듯 구보씨는 가을에 여름잠 깨듯 현실에 눈을 뜬 것 이고 보면, 오늘 이른 시간에 허둥지둥 달려나가는 것도 그럼직 한 것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한 십여분 출근길을 헤쳐 모교에 도착해서는 바로 인문대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사 K교수와 약속시간은 아직 일렀지만, 과사무실 직원들과 덕담이나 할 작 정이었다. 어짜피 시간강사라도 맡게 되면 부대껴야 할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지나다 흘깃 보니 K교수가 교수휴게실에 느긋 이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교수님 일찍 나오셨군요. 지나다 보니.." "여어 자넨가. 건강은 어떤가. 안경돗수는 더 높아진것 같구만. 하긴 원고지와 씨름하는 형편이면 그럴테지." "그런편이 지요. 원고지대신에 모니터에 키보드와 뒹굴고 있기는 하지 만.." "아! 참 자네가 첨단 글쟁이란 걸 깜박했구만.허허. 자네 책 재밌다던데. 아들놈이 3편 얻어달라고 조르던 걸. 그 제목 이 뭐더라. 샤.. 샤톡의 뭐.." "샤르토크의 은하여정입니다. 3 편은 쓰는 중인걸요." "그렇지 은하여정. 그래. 결국은 인간이 태양계가 비좁으면 그 밖으로라도 도망쳐야겠지. 살다가 싫증이 나면 종교를 찾던지, 어디로든지 있는데로 달아나는게 좀 낫다 는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한 일 아닌가. 그래. 자네도 글만 쓰다 보니 답답했던 모양이지?" "그냥.. 나이도 있구요. 너무 생각이 현실에서 달아나는 것 같아서요. 일이라도 해볼까 해서.." "마침 잘되었네. 어제 전화로도 잠깐 말했지만, 이번 학장회의에서 인 문대에도 과학사강의를 개설하기로 했는데, 자네가 마침 바람난 역사학도 아닌가?" "에이 교수님. 바람이라뇨." "아 역사쟁이가 우주선 엔진을 만듭네 하고 재깍 전공을 바꾸었으면 바람이지. 어디 그게 수절과부라도 되는감? 그러고선 이제 책을 쓴다 그러 고 있으니. 하여간에 한번 해보게. 항공우주학을 전공한 역사학 도정도면 아 애들이야 못 가르치겄어. 자네 논문 사본이랑 이력 서 과로 제출하게. 글피까지."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러면 2 학기부터 출강이군요." 오는길에 구보씨는 순환도로변에 바람따 라 흩어지는 초가을 햇볕에 넋을 팔고 걷고 있었다. 과학사라. <프톨레마이오스와 헤르도투스가 바라본 세상의 초가을 햇볕이 어떻게 다른가?> 이 정도를 중간고사 문제 2번쯤에 박아놓으면 그 초롱초롱한 콘택트렌즈빛 눈망울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 나가는 좌석버스의 흉흉함에 놀라 얼른 인도로 올라선 구보씨는 담배를 한 모금 맛있게 빨아서는 열심히 그 잔해를 브라운 운동 시켜며 생각한다. 누구였을까? 자전거를 제일 처음 후륜구동으 로 만든 그는. *********************************************************** #2 구보씨는 오피스텔 식탁 한 구석에서 싸이펀에다가 자메이카산 커피를 넣고는 잔뜩 폼을 내며 알콜램프에 불을 붙였다. 최첨단 커피메이커를 부엌에 두고서는 이렇게 궁상을 떠는 이유는 최근 에 맡은 과학사강의 탓도 없지는 않았다. 과학보다는 기실 연금 술과 신화적 상상력이 무대를 누비고 다녔던 지난 시기를 점잖 게 세기별로 분류해내는 것은 정말 멋없는 과학사강의가 아닌 가? 역사란 각종 왕조의 흥망사정도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신출내기 역사가 지망생들한테 전혀 새로운 상상력으로과거를 재구성시켜 줄 수 있다면 나의 첫 강의는 성공이다라고 짐짓 '거대한' 목표를 설정한 구보씨는 스스로의 녹슨 상상력을 닦아 내느라 <18C 연금술과 화학기술>이라는 문고판 단행본을 꺼내들 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수은을 시험관에서 끓인다음 말 꼬 리털 12가닥과 계란부스러기 몇 조각을 물에 녹인다음 '신의 기 체'로 수상치환을 시켜서 이를 .. 이런 문구들을 싱긋이 읽고 있는 것은 좋은데 도대체 실감이 안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궁 여지책으로 커피의 연금술 흉내를 좀 내어 폼을 잡아보고 있는 것이었다. 부글부글 끓던 물이 얇은 유리관을 타고서는 중력을 싹 무시한 채 위로 치솟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체가 눈에 보이는 물을 위로 몰아붙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중 력,에테르,일산화 탄소,정전기,그리고 과거의 신화와 정령들속 에서 언뜻 언뜻 고개를 내비치는 과학의 여신. ..과거의 현실을 머리속에서 빈자리없이 재구성할때는 오늘날의 세련된 과학기술이 그 조상을 살펴보면 얼마나 옜사람들의 상상 력에 많은 부분을 빚져왔으며, 그러한 과학의 조상벌인 주술과 마법이 예로부터 귀족과 왕족을 포함한 많은 '과학적으로 평범 한' 사람들의 일상을 깊이 사로잡고 있었는지 여러분들은 이해 를 해야합니다. 오늘 이 넓은 대형강의동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 은 그런점에 대한 힌트를 랩송을 즐기듯이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이번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선생님! 질문이 있는데요." "말 해보세요." "샤르토크는 언제 지구로 귀환하게 되나요?" "선생님 소설 주인공은 왜 결혼을 안하죠?" "sf소설이 역사적 인 가치가 있나요?" "노래방의 과학사적인 의미는 어떻게 평가 하시나요?" "저기요. 중간고사는 치실건가요?".. 2류 소설가의 싸인회정도로 강의실을 만들어버린 '육체적 감각 이 평범하지 않은' 당돌한 새내기들을 뒤로 두고 부리나케 강의 실을 빠져나온 구보씨는 부랴부랴 간이매점으로 달려가서는 이-오니카하나를 세련된 포옴으로 주문했다. 그 뒤에는 여배우 하나가 각종 양이온과 음이온이 가득찬 깡통을 하나 들고선 희 랍의 광장에 나타난 21세기 오렌지족처럼 배시시 웃고 있었다. ************************************************************ #3 막 관철동 기원을 나선 구보씨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종로 2가 변의 좌석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낯익은 번호의 버스들이 줄을 이어 있고, 자주색 줄무늬 셔츠 차림의 두 남녀가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는 히히덕거리면서 가을을 걷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전을 찾느라 주머니를 뒤지니, 만원짜리 한장만 멀 쩡히 구겨져 들어 있다. 이거 참. 좌석타고 주제에 지폐랍시고 턱 내밀고도 뭣하고.. 가만.. 약국에서 박카스 D인지..F하는 드 링크제나 ..아니야. 명색이 작가인 내가. 그래. 책이나 한 권 사 자. 구보씨는 당당한 표정으로 사뭇 느긋하게 서점에 들어섰다. 서점은 토요일이라 붐비는 경황중에서도, 스피커에서는 '대지의 여신에게 바치는 노래'가 이름에 걸맞게 흐르고 있는 모습. 구보씨는 평범한 작가 특유의 태도를 견지하며 -인기소설 best 7 이니, 금주의 인기작가 순위..운운하는 코너에서 잠시 눈쌀을 찌 푸리는 한편, 무심한 표정의 독자들을 할인매장의 전자제품 코너 에 들린 주부쳐다보듯이 �도굶咀릿� 정도의 표준적인 태도- 뚜벅뚜벅 '공포,추리물-납량특집'이란 잘 팔리는 코너의 구석으 로 초초히 걸어 갔다. 최근에 주목을 받는 신예 추리작가들의 발 표작이나,세계 추리걸작선,미국 추리걸작선,심지어 프랑스,영국, 일본,남미 등등 온 세계의 추리걸작선에다가,무슨무슨 ..살인 시 리즈가 온통 한 코너를 도배하고 있었다. 그래도 구보씨는 굴하 지 않고 자랑스럽게 그속에서 분투하면서 고개를 들고 있는 sf소 설들에 애정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손수 만져서 하나하나 펼쳐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화성의 겨울에 우주선의 추진풍으로 인한 바람이 여름처럼 스쳐 지나가는 광경의 절묘한 표현앞에서 구보씨는 새삼 넋을 잃고 히 죽거리고 말았다. 깔끔한 유니폼의 아가씨가 눈총을 주더니, 고 개를 흔들고 지나간다. "거 참. 세익스피어가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가는 듯한 문장이군." 구보씨는 자신이 쓰고 있는 <샤르토크 의 은하여정>의 2편의 말미에 암청색행성을 휩쓸고 지나가는 탄 화수소의 폭풍을 묘사하느라 일주일을 헤멘 경험을 상기시켰다. .."문제는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느냔데." 첫째, 전지적 관점에서 행성 곳곳의 변화를 거시적으로 그리고 때론 국부적으로 섬세히 묘사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말이 쉽지. 이런 식으로 쓰면 너댓 줄 쓰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브 리태니커 인덱스니, ..의 천문학 입문,머크 인덱스,crc핸드북 이 런 '부피'있는 책들의 잔뜩 쌓아놓고서도 단 한줄의 '과학적'인 문구를 생산해내기가 쉽지가 않은 것이다. 비록 하드sf의 거장의 말석에도 끼이지 못하는 처지이지만, 모 영화에 나오듯 running time 2분도 채 안돼서 행성의 대기가 만들어지고 하늘 색이 바뀌 고 .., 이렇게 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둘째, 그렇다면 일단 '돔 밖에는 광대한 폭풍이 이 행성을 뒤흔 들고 있다. 그것을 쳐다보는샤르토크의 눈에는..'식으로 저 밖 에는 '애매한'폭풍이 불고 있고, 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불러내서는 독자들을 속여야 하는 것인데, 자고로 이런 속임수는 비록 국내 sf독자층이 엷다고는 하나, 날 카로운 매니아가 적지않은 터에 몇 발자욱 못가서 난타를 당하고 말것이다. 게다가 나스스로도 영 탐탁치 않고.. 그런데, 이 작가는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화성의 주민이 사는 동네의 정겹고도 이국적인 묘사와 대화속에 잠깐 스친 우주선의 추진풍의 얘기 몇마디에 마치 홀로그램처럼 그 행성의 상황을 감 치게 그리고, 따지고 봐도 과학적으로 당위성이 있게, 영상화시 켜 주는 것 아닌가. 구보씨는 담배를 입에 물다가 여직원한테 한 소리 듣고는 더더욱 풀이 죽어서 책 한권을 사들고는 최신식 수직위치이동기앞에 섰 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 와도 정신을 못 차린채, 손에 든 책의 제목만 입맛을 다시며 보 고 있었다. 이렇게 제목을 중얼거리면서. <절망이 아닌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