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sf의 명장면들 # 5 - 남극의 대빙원에 피워진 모닥불 - ( 르 귄의 'sur'중에서 ) 누가 제게 '인상 깊었던 영화가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전 많은 명화를 제 쳐놓고, '폭주기관차'라는 영화를 듭니다. 감옥에서 죄수 몇 명이 탈옥해서 열차를 점거하고 그 열차는 정규선로를 이탈해서 위험한 다리로 돌진해 간다 는 진부한 내용의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면서 제가 넋을 잃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영화의 배경탓이었죠. 주인공이 총을 쏘건,열차지붕위 로 올라가건 말건 간에 저는 배경으로 펼쳐지던 북구유럽의 눈보라치던 풍경만 정신 없이 쳐다 보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사정은 '정복자 펠레'라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죠. 하하. sf의 명장면..해놓고 갑자기 무슨 영화얘긴가 하시는 군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북구의 풍경에 푹빠져있는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극지방의 얼음지대에 푹빠진 작가가 바로 어슐러 K. 르귄이 아닐까 해서 꺼내본 얘기입니다. 'Sur'라는 르귄의 단편은 르귄이 북극이나 남극의 얼음지대를 동경하다 못해 직접 가지는 못하고 소설적인 상상력을 통해서나마 '기어코 가보려고' 쓴 소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남극점 탐험으로 유명한 스코트 대장과 아문센등이 남극을 정복하기 이전에 순전히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아마추어 탐사대가 남극을 이미,그리고 몰래 다녀가게 된다는 얘기이죠. (물론, 가상의 설정입니다.) 르귄은 이 단편에서 남극대륙의 탐험에 대한 '부푼 꿈'을 너무나도 생기있게 불어넣어서 읽다보면 '나도 한번 가봐?'하는 생각이들 정도입니다. 어찌보면 '암흑의 왼손'에서의 얼음지대를 에스트라벤과 주인공이 통과하는 장면과도 비슷하지만, 그 보다는 훨씬 밝은 분위기에,아름답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정말 '명장면'이라 불릴만한 대목이 많습니다. 그 전에 여러분 르 귄의 유머어를 보시겠습니까? 우선,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남극탐사대'일행이 처음 도착해서 앞서 남극대 륙 일부를 탐사했던 팀들이 사용한 '막사'를 발견합니다. 아주 어수선해져 있었죠. 앞선 일행은 뭔가에 쫓겨 급히 떠난 듯합니다. 그 걸 보고 이 당찬 여성들이 하는 말이 대충 이런 식이죠. "에구. 좀 치워놓고 떠나지. 하긴 남자들이 치워봐야 뭐. 역시 집안청소라는 무한한 예술은 아마추어들이 손댈일이 못돼." 재미있는 표현이죠? 또 이건 어떻습니까? 우여곡절끝에 남극점에 도달해서는 혹시 나중에 남자들이 와서 실망이라도 할까봐 아무 표시도 안남기고 바로 떠납니다. 그 때 일행중의 돌로레스가 후아나에게 묻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지?" 그러니, 후아나는 딴전을 부리며 "북쪽" 이럽니다. 남극에서야 어디로 가도 북쪽이겠죠.하하. 그러나, 다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극탐사대'일행이 남극점을 정복하고 자신들을 데려갈 배를 기다리는 동안 테레사라는 여자가 아이를 낳습니다. 그런데 애를 낳는 동안 계속해서 '호세! 호세!'하고 남편 이름을 외칩니다. 저는 처음에 아! 역시 부부간의 정이란..하다가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아이 낳다보니,'왜 부부인데 나만 이렇게 고생을 해야하지?'하고 분해서 소리를 치고 있는 겁니다. 이렇듯 르귄은 삭막한 탐험보고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유머를 넣어두고 있습니다. 물론, 메시지가 있는 유머어들입니다. 온건한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정말 인상깊은 것들은, 시처럼 아름다운 표현과 '명장면'이 곳곳에 숨어 있는 점입니다. 고래들이 평화롭게 노니는 장면이라든지, 빙하사이로 배가 지나가는 부분, 빙하위를 지나면서 그 위를 바람같이 뛰노는 투명한 소떼들을 상상하는 장면들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표나지 않게 숨겨놓은 아름다운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조금만 옮겨볼까요? - 그날 밤 우리 아홉 모두는 얼음 평원의 심장부에 와 있었다. ..... 모두들 아주 행복했다.우리는 노래불렀다. 그 위대한 침묵속에서 우리들 목소리는 그토록 가냘프게 들렸었다. 왜 지금 그 생각이 떠오르는 걸까? 그 때 날씨는 흐렸고 눈이 올 것 같 았다. 그림자도 나지 않았고 지평선도 안보이고 평원의 정적을 깨뜨리는 어 떤 물체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거기 서 우린 참새처럼 펄쩍 펄쩍 뛰면서 노래를 불렀다. - 백야 현상이 일어나는 낮도 밤도 아닌 그런 곳에 끝없이 펼쳐진 빙원속에서 모두들 모닥불을 피워놓고(사실, 모닥불을 피웠다는 말은 없군요. 하지만,저 는 그게 눈에 선합니다.) 추위에 떨며 모여앉아 있습니다. 사방에는 '위대한 침묵'이 가득하고 움직이는 것도 없고,날은 흐리고, 눈이 올 것 같은데, 거 기서 행복해하며 '참새'처럼 갸냘프게 노래를 부르면서 뛰어놀고 있는겁니다. 왜 '참새'처럼일까요? 카메라를 기중기에 태워서 고도를 높여보세요. 한 수 백미터 높이쯤의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지점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그게 보입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경이로운 극지대의 빙원 저 한 모퉁이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자그맣게 행복히 뛰노는 그네들의 모습이 말입니다. 이런 멋진 장면을 슬그머니 '아무것도 아닌 척' 줄거리 한 구석에 갖다 놓은 르귄의 능청에 'sur'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정말 줄거리보다는 볼거리가 많은 아름다운 단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