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신주와 인디언 - 이기훈 그렇게 인상적인 그림을 난 본 적이 없다. 눈 내린 북미대륙의 벌판에 두마리의 말들이 시들은 들풀을 찾아 뜯고 있었다. 그리고 유화답지 않게 연하게 칠해진 하늘의저녁빛. 하지만 그런 인상적 인 색감이나 구도가 전부였다면 그 그림은 평범한 아름다운 그림 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다, 뭔가 다른 그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림에는 나무 기둥들이 벌판 끝까지 급격한 원근법으로 늘어서 있었는데, 위쪽으로는 가느다란 줄이 기둥마다 서로 이어 져 있었다. 그런데, 맨 앞의 나무 기둥에 한 인디언이 낡은 웃옷 옆으로 총을 끼고 기대어서 있는게 아닌가. 내가 충격을 받은것은 그 눈내린 벌판에 혼자 서있는 인디언의 그 표정 때문이었다. 무언가 얘기를 하고 있는 듯도 싶었고, 어쩌면 애타는 심정으로 나무에 기대어 뭔가를 귀기울이고 있는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간 신히 정신을 좀 차리고나니, 이번에 웨스트 일렉트릭 회사의 본관 에 걸린 그 벽화같은 그림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 해리파니. 제목: { 말하는 전깃줄 } 작품설명 : 19세기에 전기가 개발되어 북미평원에 전신주가 착착 세워지자, 북미평원의 토착인디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해리 파니가 그린 당시의 유화인 이 그림은... 아, 저 인디언은 나무 전신주에 귀를 대고서 무엇을 듣고 있었을 까. 북미평원에 뿌리내리는 침략자의목소리라도 느낀 것일까. 옆 의 제임스가 갑자기 코웃음을치며 한마디 내뱉었다. " 이봐 지섭. 러시아 놈들이 만주와 시베리아에 철도를 깐 다음에 가장 골치를 앓은게 뭔지 아나?마적? 일본놈? 곰? 하하. 아닐세. 바로 호랑이야, 호랑이. 곰이나 멧돼지는 기관차가 지나가면 도전 을 한답시고 달려들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열차의 속도를 약간 늦 추게 할 뿐이었지. 하지만, 그 놈의 호랑이는, 언제나 철길에 턱 버티고 앉아서 열차를 쳐다본다네. 아니, 당해본 기관사들의 수기에 따르면 어떤 호랑이는 기관사를 뚫어지게 쳐다본다고도 하고, 어떤 놈들은 달려드는 기관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뭔가에 곰곰히 귀를 기울인다는 거야. 아뭏든 그러는 호랑이를 기관차로 치고 살아남은 기관사는 한 사람 밖에 없었다더군. 다시는 기관차를 몰지 못했다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이런 모르겠나? 저 인디언을 보란 말일세. 영락없는 그 꼴 아닌 가. 젠장, 저건 전신주에 귀를 기울이는 게 아냐. 우릴 쳐다보는 거라구. 우릴. 이 잘난 회사에서는 저런 그림을 자랑이라고 여기 에 걸어놨으니." "자넨, 신경과민이야. 이번 프로젝트가 남미 오지라니까 쓸데 없 이 예민한 거겠지." 이렇게 말했지만, 나도 좀 입맛이 개운치는 않았다. 이번 웨스트 일렉트릭 회사에서 따낸 프로젝트란, 남미 오지의 산간밀림 지방 에 '완벽하게 빛을 제공'한다는 거대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밀림 에서 몇 달이고 보낼 것도 고역이었지만, 잉카의 고대문명을 훼손 한다 해서 빗발치는 항의와 고소에회사는 계속 시달리고 있는 것 이다. 게다가 간혹 이상한 문양이 그려진 칼 같은 걸 보내서 협박 을 하는 작자까지 있었으니, 제임스나 내가 예민해지는 건 되려 정상이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프로젝트는 시작되어서 제임스와 나를 포 함한 이번 기획팀은 잉카의 숨은 유적들과 독충과 늪지가 섞여 있 는 밀림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결론 부터 말하자면 그 프로젝 트는 결국 실패를 했다. 누가 볼지도 알 수 없는 이 일지에다가 짤막히 그 때의 상황을 적어 놓는 건, 나도 해리 파니라는 화가가 그린 {말하는 전깃줄}이라는 그림처럼 뭔가 남겨보고픈 충동이 앞 선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은 꼭 그러한 이유때문인지는 자신이 없다. 더구나, 당시에 퍼진 온갖 억측과 소문을 굳이 이 짤 막한 기록으로 불식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뭏든, 내가 아무리 회사 기밀문서 보관실 한 구석에 이 숨겨 놓아도 언젠가는 누군가 보고 무릎을 치거나, 혹은 코웃음을 치며 불태워 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 ..이번 공사의 핵심은티칼 지방의 거대한 석상이 밀집해 있는 분지에 대규모의 중간 송전탑을 세우는 것이었다. 우리 팀은 일단 근처의 비행장에 도착한 다음 험한 산악지대와 사람이 접근할 수 조차 없어 보이는 그 밀림을 뚫고 첨단장비를 끌고서 티칼 지방 으로 접근해갔다. 연간 5000mm의 비가 내리고 언제나 낮은 구름이 안개처럼 시야를 가리는 그 곳에 기초 설비를 하느라 회사는 벌써 수억달러의 경비를 지출했다. 우리는 밀림 곳곳에 송전 설비와 전 셈� 지하에 깔면서 각종 야생동물과 뱀들이 살고 있는 늪지대를 누볐다. 그리고 회사가 제공한 첨단 방호장치와 개척장비를 가지 고서도 반 쯤은 목숨을 건 일을 여러번 겪어가면서 티칼지방의 대 형 송전탑으로 송전 선로를 개척해 갔다. 그래도 결국 자본의 위 력은 놀라운지라, 남미연합이 약속한 거액의 달러가 제공하는 추 진력은 우리를 무섭게 몰아쳤다. 티칼에는 알려진대로 거대한 석상이 절묘한 구조의 피라미드형 건물과 어울려 서 있었고, 가운데 밀림이 불태워진 넓은 공간에는 에펠탑처럼 앙상하지만 거대한 송전철탑이 회사에 의해 1차로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쏟아지는 폭우속에서 민활하게 움직여서 작업을 계속 해갔다. 그러던 어느날, 결국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어쩌면 케이블 tv에 자주 나오는 유적탐사 관련 괴기 영화를 많이 본 직원들의 긴장 탓에 소문이 더 기괴하게 퍼졌는지도 모른다. 한 노동자가 낮은 돌무덤 주변에서 피투성이로 발견되었다. 우리 모두는긴장했고, 진상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영화와는 다르게 진상은 곧 밝 혀졌다. 두 사람의 노동자가 낮은 돌무덤 내부에서 굉장한 황금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발견한 두사람의 탐욕때문에 서로 칼부림을 했을 따름이었다. 어쨋든, 황금은 복잡한 국제법규와 일 단의 법률전문가들이 잘 알아서처리하였다. 하지만 웅성거리는 소문과 저주에 대한 공포가 행정절차처럼 그리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 나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날은 정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그리고, 저녁무렵의 황혼 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쩌면나는 최면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바 쁜 와중에 나는 간단한 열병을 앓았고 삼 일째 감당하기 어려운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꿈에는 밤마다 나의 고향 사람들이 나타났 다. 처음에는 가족, 친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결국에는 온 나라 백성들이 다 타나탔다. 그들은 하늘 끝까지 닿은 전신주 에 다가가서 한사람씩 귀를 기울이고 나서는 나를 쳐다보는 것이 었다. 나로서는의외였다. 온 세계가 블럭화 된지가 수십년이나 되었는데, 새삼스럽게 몰락한 조선왕조 신국의 일이 꿈에 나타났 으니. 어쩌면 쇄국정책에 홀로 당당히 성공해서 두차례의 세계대 전을 버텼던 대원군이 틀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화려한 서양문물앞에서는 무너지게 되어 있 었던 것을. 결국 1945년 처절한 왕조의 최후를 맞으며 나라 백성의 3분의 1이 몰살당하지 않았던가. 온 백성이 전신주에 다가가서 귀를 대고 소리를 듣고 고민에 잠기는 그 꿈은 열병과 겹쳐서 나 를 최면상태까지몰고 갔을 것이다. 아뭏든, 그 날 저녁 나는 열 개의 석상이 환한 석양에 비쳐서 황금빛으로 물들며 벌판에 서있 는 걸 홀린듯이 쳐다보고 있엇다. 황금빛의 석상은 전신주 곁의 인디 언처럼, 철길에 앉아있는 호랑이처럼, 그리고 꿈속에서 날 쳐다보 던 우리네 백성들처럼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내게도 그 소리가들렸다. 그들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귀기울였던 소리 는 바로 소멸하는 그 모든 문명의 소리였던 것이다. 아마, 그 즈 음이었을 것이다.겁먹은 현장 인부들이 퍼뜨린 소문에 의하면 전 설의 잉카족 황금의 전사가 그 날밤 나타나 드높은 소리를 지르면 서 탑 위로 올라갔다고 한다. 어떤 이에 의하면 그 전사가 송전탑 의 전압제어소 근처의 돌무덤으로 뛰어갔다고도 한다. 아뭏든 공 통적으로 들리는 얘기는비도 안내리는 마른 밤하늘의 송전탑에서 수백갈래의 번개가 사방으로 솟구쳤다는 점이다. 후에 도착한 조사팀이 누군가가 고의로 송전탑의 모든 자기제어 절연 스위치를 꺼버렸다고 아무리 떠들어 대도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나는 그들의 성실한 보고가 사실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 잉카는다시 그들의 안온한 어둠에 잠길 수 있게 되었고, 중요한건 전신주에 기대어 나를 쳐다보던 그림속 인디언의 눈빛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눈빛은항거할 수 없이 다가오는 역 사의 야비한 흐름을 쳐다보는 항의와 슬픔을 담은 눈빛이었다. 그 인디언은 아마도 마지막까지 총을 쏘다 장렬히 전사했을 것이다. 어쩌면 인디안 보호구에서 한을 되새기며 그냥 평범히쇄락해갔을수도 있긴 하다. ] 나는 요즘도 그 그림을 아침저녁으로 쳐다보면서 웨스트 일렉트릭 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석간 신문에는옛 조선왕 조 신국의 한 테러리스트가 북미연합의 대통령을 암습했다는 기사 가 났다. 실수로 그리 많은 단서를 남겼으니, 이제 나도 잡힐 것 같다. 창 밖의 황혼은 점점 더 짙게 물들고 있다. 禪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