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이기훈 선숙은 요즘 고민에 빠졌다. 바로 뉴질랜드에 유학 가있는 그녀의 약혼자 명준때문이었다. 하루 가 멀다하고 전화연락을 하던 명준에게서 소식이 몇 달째 끊어진 것이다. 그이에게 무슨 일이 생 기지나 않았을까. 선숙은 명준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명 준에게 딴 여자가 생겼다거나, 자신에게 싫증이 났다거나 그런 류의 문제라면 선숙은 오히려 담 담할 수 있었다. 적어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청순가련형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 리 생각해도 명준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지금 걱정을 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마음가득 그것 이 느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선숙은 결국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결론을 내렸 다. 선숙은 그래서 한 달여전 부터 뉴질랜드에 있는 친지에게 연락도 해보고 이리저리 수소문을 했다. 그러나, 명준의 소식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뉴질랜드 경찰당국에 실종신 고도 내보았지만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급기야 선숙은 뉴질랜드로 직접 가볼 생각을 하게 되었 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선숙이 뉴질랜드행 항공편을 예약하고 이런 저런 수속을 하느라 퍼스널 컴퓨터를 켜고 개인전산망 접속 프로그램을 실행했을 때였다. 화면가득 이런 메시지가 깜 박이면서 그 배경으로 명준이 활짝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선숙씨 잘 있었어?' 하마터면 선숙은 와락 모니터를 끌어안을 뻔했다. 실은 그 화면은 명준에게서 전자메일[1]로 인 터넷을 통해서 편지가 왔을때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것이었다. 프로그래머인 명준이 유학을 떠나 기전에 선숙의 컴퓨터에 그렇게 설치를 해준 것이다. 선숙은 허겁지겁 전자장갑[2]을 끼고 손가락 을 튀겨서 편지읽기 모드를 선택했다. 그러자 눈앞에 홀로그램[3]으로 편지봉투가 잠깐 떠올랐다 가 이내 낯익은 명준의 글씨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떠오르는 글씨에 맞춰서 귀에 익은 명준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숙씨 연락이 뜸해서 놀랐지? 잠깐 어디 다녀왔어. 뉴질랜드 오지에 여행갈 곳이 워낙 많더라 구. 그런데 워낙 오지라서 위성통신망도 혼선이 자주되고, 장비도 고장나고...아뭏든 미안해...' 선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야속한 사람. 장난꾸러기. 하기야, 예전에도 명준은 엉뚱한 구석 이 있어서 며칠이고 훌쩍 떠나서 여행을 다녀오곤 했었다. 그 날 이후로, 다시 명준에게서는 이틀에 한 번씩 그런 식으로 계속 다정한 편지가 왔다. 다정다 감한 일상얘기에서 부터, 요즘 하고 있는 일이라든지, 그런 얘기들을 둘은 편지로 주고받았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면, 화상전화라던가, 직접 휴대용 위성통신 전화기를 이용하지 않고 꼭 인터넷을 이용해서 전자메일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선숙은 구식으로 전자메일이 오가는 것 도 낭만적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선숙은 마냥 행복했고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선숙은 다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가을이 다가온 탓이려니 하고 는 있었지만, 웬지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명준에게서 오는 편지도 이상하게 내 용이 은근히 심각해지고 있었다. 뭔지 알수는 없지만 마치 선숙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듯도 했고, 아니면 뭔가 준비를 시키려는 듯한 느낌도 드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선숙씨, 인생이란 것은 참 묘한 거야. 죽음과 삶이란 원래 그리 먼 것이 아니거든..' '선숙씨, 요즘 가을이라고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냐? 우리 선숙씨는 참 활달해. 그래도, 혹시 모르 니, 나 없는 동안 얘기 나눌 친구들 많이 사귀어 둬. 혹시 모르잖아.' '참, 그런 게 정말 있을까? 종교에서 말하는 다음세상 말야. 아마 있을 거야. 우리가 이렇게 행복 하게 지낸 다음이라도 다른 세상에 또 못만나면 억울하잖아?' 선숙은 고민 끝에 단안을 내렸다. 아무래도 명준씨에게 무슨 일이 있는거야. 그래서, 선숙은 이 번에는 뉴질랜드 사설탐정에게 선숙이 받은 편지등을 자료로 제공하면서 명준의 신상에 관한 조 사를 의뢰했고, 선숙 자신도 급히 뉴질랜드로 날아갔다. 여차하면, 몇 달이고 당장 눌러앉아 명준 을 도울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명준은 간 곳이 없었고,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살던 아파트에 가봐도 이미 오래전에 떠났다는 것이고, 대학도, 그가 아르바이트 하던 식당에도, 그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남 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선숙이 뉴질랜드에서 헤메고 다니는 동안에도 명준에게서 한 국으로 전자메일이 계속 날아들었다는 점이었다. 선숙은 다시 뉴질랜드 실종자 신고센터에 들렸 고, 그러던 차에 고용했던 탐정에게서 급한 연락을 받았다. "함께 가서 만날 분이 있습니다. 17번가 109번 사무실로 오세요." 선숙은 허겁지겁 달려갔다. 탐정의 목소리가 낮았던 것으로 보아 좋은 일은 아닐거라고 느껴졌 다. 도착해보니 그 곳은 커다란 건물의 컴퓨터연구소였고, 그 곳에 전산망 프로그램 담당이라는 낯선 남자가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탐정이 말했다. "명준씨는 8개월전 불치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분은 훌륭한 프로그래머였더군요." 지금 저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죽다니, 누가.. 선숙이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 낯선 사내가 커다란 스크린을 내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명준씨는 유품을 남기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 남긴 건지도 모르죠. 이제 껏 6개월간 선숙씨가 받은 편지는 모두 죽음을 예감한 명준씨가 미리 짜놓은 고도의 프로그램이 대신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커다란 스크린에는 뉴질랜드와 아시아를 잇는 주요 인터넷 전산망 회선이 그려져 있었고, 그 복잡한 회선속으로 한 줄기 가느다란 빛줄기가 쉴 새없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 것이 명준이 만든 그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그 사내는 그 프로그램이 일종의 바이러스 프로그램[4]이며, 인 공지능[5]의 전단계의 아주 우수한 프로그램이니 어쩌니,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미 선 숙은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전혀 다른 목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선숙씨, 미안해. 내가 없으면 우리 선숙씨 충격받을까봐... 마음 굳게 먹고...알지? 활짝 웃어봐. 어서.." 선숙은 어디선가 명준이 보고 있을 것 같아 글썽이는 눈으로 웃으려, 웃어보이려 그렇게 애를 쓰고 있었고, 탐정과 사내는 쓰러지는 선숙을 황급히 부축하고 있었다. [1] 전자메일 : 전화선이나 광케이블등을 통해서 컴퓨터로 보내는 편지. 인터넷 등의 전산망을 통 하면 현재에도 거의 전세계 대부분의 곳으로 즉시 문서를 주고 받을 수 있다. [2] 전자장갑 : 현재에는 키보드나 마우스 등으로 컴퓨터를 조작하지만 미래에는 인간의 좀 더 세 밀한 동작을 이용하는 전자장갑등이 쓰일 것이다. 현재 초보적인 형태는 널리 연구되고 있다. [3] 홀로그램 : 허공 중에 상이 맺혀서 실제로 무언가가 있는 것 처럼 보이는 현상. 주로 광학적 인 원리에 의한 것으로, 현재 갈수록 응용기술이 발전하고 있다. [4] 바이러스 프로그램 : 컴퓨터나 전산망에서 몰래 실행되어 특수한 목적을 실행하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소프트웨어이다. [5] 인공지능 : 인간과 유사하게 유연한 사고를 하는 컴퓨터. 현재는 초기개발단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