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 계신 아버지 이기훈 그 날 난 아버지의 일기를 발견하였다. 그것이 도대체 나에게 어떤 의미 를 지니는지 알 겨를도 없이 나는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넘기고 말았다. ".. 어떤 이는 우연히, 아주 우연히도 자신의 운명과는 그토록 먼 곳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언제나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그 어떤 곳에 대한 향수를 가슴에 품고 살게 된다. 늘 보는 집과 가족과 거리속에서 느 끼는 그 낯설음. 그러나, 마치 어떤 신비로운 힘이 꽃씨를 바람에 날리듯 자신을 한 인연의 자락으로 이끌때 그는 어느새 격세유전처럼 내려온 기 억을 떠올리고는 고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내가 막 걸음을 걷기도 전에 불쑥 가족을 두고 떠나셨다는 아버지. 그의 일기가 어떻게 해서, 이젠 창고가 된 가족용 핵대피소의 한 구석에 놓여 져 있었던 것일까. 콧수염을 기르고, 언제나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가끔씩 이웃동네의 두꺼운 시멘트 건물에 가서 며칠씩 무언가를 하시고, 그러다 가는, 불쑥 보름이고 한달이고 가방하나를 들고 여행을 다니셨다는 아버 지. 어머니는 자신의 열등감에서였는지 길거리에 세련미를 물씬풍기고 다 녔던 그런 여자들을 아버지의 가출과 연관을 시켰고,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뭔가 그리우면서도 항상 부끄럽고, 무책임하고 미운 존재였다.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의 여자타령이 어느정 도 무책임한 추측에 불과했다는 걸 알고나서도 여전히 어린 아들과 아내 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 버지의 일기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나는, 갑자기 입양된 고아가 어색한 친척을 만난 그런 심정이라도 되어 서 그만 몇 페이지를 넘기다가 말고, 그 일기장을 들고 나왔다. 쌀쌀한 날씨답게 마당에는 바람이 차갑게 불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래층에서 바 느질을 하느라 돋보기를 들여다보고 계셨다. 따스한 남쪽 부산에라도 가 서 사시라는 말에 한사코 고향인 이곳 중강진만 고집하고 계신 어머니. 어쩌면 어머니는 웬 젊은 여자와 눈이라도 맞아서 떠나버렸다고 말도 꺼 내지 못하게 하는 아버지를 내심은 기다리고 계신지도 몰랐다. 나는 아버 지의 일기장 얘기를 할까 어쩔까 하다가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롭게 계시 는 모습을차마 흐트리지 못하고 그냥 이층으로 올라와서 침대에 누웠다. 이층의 창으로 바람이 휭하니 불더니, 눈보라가 곧 몰아칠 기세였다. 이 제 곧 이 지구를 떠나 켄타리우스 성좌를 향한 개척선에 탑승해야 한다 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그 것보다는 억지로 모른척하고 책 상위에 놓아둔 아버지의 일기장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아버지 일 기장의 첫 페이지의 귀절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어떤 이는 우연히, 아주 우연히도 자신의 운명과는 그토록 먼 곳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나의 운명은 어느 곳이란말인가. 어린 시절 부터 어딘가로 떠나고픈 동 경에 시달리곤 했지만, 그 것을 어떤 운명으로까지 결부시켜 본 적은 없 었다. 하지만, 이제 며칠 후 떠나면, 사실상 지구에 다시 발을 디디기 어 렵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 곳 추운 중강진에 홀로 계시고, 까마득한 그 언젠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일기장이 지금 책상 위에 있다. 결 국, 몇 시간을 그렇게 뒤척이다가 다시 난로에 물끓는 주전자 소리를 핑 계삼아 일어나 앉았다. 책상 위에는 빛 바랜 표지의 먼지가 뒤덮힌 아버 지의 일기장이 놓여있다. 나는보리차 한잔을 따라 들고서 결국 아버지의 일기장을 모두 읽어보기로 했다. 지구를 떠나기 전에. 아버지의 일기장은 몇 장이 찢겨나가 있었고, 다시 두서없이 시작되고 있 었다. " ...오늘 이곳 카자흐 공화국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도 믿으려 하 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부의 내밀한 임무를 띠고 러시아 과학사의 줄기 를 조사하던 중,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도서관에서도 구할 수 없는 다소 지역적인 자료를 구하러 그 곳 시립도서관에 들렸었다. 사실 도서관이라 기보다는 일종의 문서보관소라고 하는게 더낫지 않을까. 주요서고는 민 간인의 출입이 어려웠지만, 한국과학성의 추천서와 한국산 담배 한 갑을 디밀어서 간신히 들어갈 수가 있었다. 곳곳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책들 은 비교적 습도나 온도가 잘 조절되어 있음에도 뭔가 곰팡이가 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러시아의 극동지방의 과거의 자료들이 충실 히 있어서 흥분된 마음으로 러시아어 사전을 옆에 끼고 문서를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갑자기 이 기묘한 운명으로 몰아넣은 책을 그곳에 서 발견하게 되었다. 제목은 '카자흐 공화국내1급관리대상 문화재 현황' 이라는 것이었다. 그 책은 나의 임무와는 무관한 것이어서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뭔가 건질까 해서, 책장을 가볍게 넘겨보게 되었다. 그 런데, 갑자기 책갈피 속에 끼워진 낡은 쪽지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 심코 그 쪽지를 펼쳤는데, 그 쪽지에는 목탄으로 두번 세번 겹쳐서 최대 한 진하게 적으려고 급히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한 글씨로 이렇게 씌여 있 었던 것이다. < ...1달여 ......1만킬로미터를 ....당한 ..... 굶주림에 ....가 꼭 필요합니다. 내용은 글쓴이가 꼼꼼하게 세번, 네번 목탄으로 적은 성의에도 불구하고 종이 자체가 곰팡이가 슬어서 잘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뭔가 를 애절하게 부탁하는 내용이라고 추측되었다. 아마, 딴 사람이 보았다면 그리 놀라지 않았을 이상한 글씨에 불과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다 내가 그 토록 놀란 것은 바로 그 쪽지가 한국어로 씌여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 만, 더욱 나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쪽지 끝부분에 있는 희미한 서명이었 다. 1938년 2월 시간... 가 ..019년 이후의 ...에게 ..... 나의 ..... > 그 쪽지는 1938년의 누군가가 쓴 것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019년'이라 니. 그리고 '시간..'이라니. 1938년에서 1019년으로 쪽지를 보낼 리는 없으 니, 당연히 '..019년'은 2019년이 아닌가. 그렇다면 먼 훗날 후손이라도 발 견하고 보아달라고 쓴 쪽지란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이치에 닿지 않았 다. 쪽지 자체가 뭔가를 간절히 부탁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2019년도 아니고2019년 이후의 그 어떤 사람에게 보낸 것일까. 나는 혹 시나 해서 그 쪽지를 몰래 갖고간 노트에 끼워서 숨겨서 나왔다. 아마도 그 순간부터 어떤 운명이란 것이 내게 작용하였는지도 모른다. 도서관에 서 나올 때는 이미 저녁무렵이었는데, 먼 중앙아시아의 저녁하늘은 유난 히도 짙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 거기서 아버지의 일기의 한 부분은 다시 찢겨져 나가있었다. 어느새 창밖 에 내리던 눈발이 폭설로 변해서 퍼붓고 있었다. 언제나 말도 없이 보름 이고 한달이고 떠나곤 했다는 아버지는 이 일기장 안에서는 카자흐 공화 국에 가 있었다. 그는 '정부의 내밀한 임무'를 띠고 있다고 했다. 짐작했 던 일이지만,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는 길가는 헤픈 여자와 야밤도주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왜 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팽개치고 낯선 땅 의 도서관에 앉아서 하잘것 없는 쪽지에 이토록 '운명'이란 말을 결부시 켜가며 흥분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아버지의 낯선 흥분이 내게도 감염된 것인지, 아니면 곧 떠날 우주탐사로 인한 긴 장인지, 이마가 화끈 달아올랐다. 아래층에 내려가보니 어머니는 구식 라 디오를 나지막하게 틀어놓고 연속극을 듣고 계셨다.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각종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싸구려 단막극 따위였다. 혹시나 몰아치는 눈보라때문에 현관위까지 눈이 쌓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앞마당에 설 치된 열선을 켜놓고 다시 이층으로 돌아왔다. 아니, 책상에 덩그라니 놓 여서 실종된 아버지의 과거가 숨어있는 이 땅, 이 지구에 나를 얽매어 놓 으려고 애를 쓰는 그 일기장이 다시 나를 부른 것이다. 아버지의 일기인 지 소설인지 알 수 없는 그 책은 다시 몇 장이 불에 그을려지고, 물에젖 고 해서 알아볼 수 없었고, 한 참만에 다시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왜 하필이면 2019년이란 해 이후의 그 누군가에게 그 쪽지를 전달하 려 한 것일까. 낭만주의나 토속신앙에 물든 노인의 무시할만한 발상이었 을까. 나는 여러 연감이나 백과사전을 뒤져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가 다 시 바쁜 일에 몇 주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집 근처의 연구소에서 정부인 사를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전기에 감전된 듯한 충격을 느끼게 되었다. 그 정부인사는 내가 참여하는 이 기획이 2019팀의 일에 버금가는 국가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랬다. 2019년. 비 록 지금도 몇 몇 강대국의 정보기관만이 눈치채고 있으며, 정부내에서도 풍문으로만 떠도록 있지만, 2019년은 바로 우리 과학성에서 최초로 시간 여행 기술 개발에 성공한 해인 것이었다. 비록, 수많은 제약과 평행우주 에 관련된 이론의 불안정성이 문제로 대두되었지만, 아뭏든 인류최초로 두 사람이 과거로 갔다는 것이었고, 한 사람이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귀환했다는 것이 정보기관내에 풍문으로 나돌고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이 과거로 간 것으로 인해 현 세상이 달라진다던지 하는 '시간여행의 나비효 과'는 없었다. 아니, 있었는지도 모른다. 5년전 갑작스레 정부에서 '항성간 우주여행에 관한 신기술'을 공포한 것을 보고 주요 강대국들이 한국의 급 작스런 우주기술 진보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나로선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카자흐 공화국의 한 도서관에서 근 80여년의 세월을 건너뛴 시간여행자의 과거로부터의 메시지를 받았던 것이다. '1938년의 시간여행자가 2019년 이후의 그 누군가'인나에게 보낸 메시지를! 그는 필경, 2019년 이후에야 시간여행 관련 기술이 개발된 것 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난 쪽지의 내용을 근거로 도대체 그 시간여행자가 어떠한 상황 에 처했길래 그렇게 애타게 나를 불렀는지 나는 그해 여름 내내 조사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 나는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2019팀의 국장을 설득하 는데 몇 달이 걸렸지만, 이미 난 떠나기로 작정한 터였는지라 지속적으로 국장을 찾아갔고, 몇 달이 지난 그 후, 마침내 국장에게서 은밀한 전화가 걸려왔다......" 다시 책장이 찢어져 있엇다. 언젠가, 아버지를찾아 헤멘 적이 있었다. 하 지만, 아버지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 도 없었다. 어쩌면 내가 이 지구를 떠나서 켄타리우스로 떠나려 한 것도 그러한 상실감 탓인지도 모른다. 아, 그러나 왜 그 생각을 못했던가. 아버 지는 과거로 떠났던 것이었다. 과거. 아버지의 일기는 이 이후로는 거의 뜯겨져 나가 있거나 남은 것도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군데군 데의 흔적으로 미루어 아버지는 1938년의 그 사람이 간절히 원했던 그 무언가를 간신히추측해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누워있는 어머 니와 어린 나를 유난히도 길게 바라보다가 떠나신 그날, 그래서 잠드신 척하는 어머니가 유난히도 못내 가슴앓았던 바로 그날의 일기장 마지막 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지금 떠나면 돌아올 수 있을까..... 어린 아들과 아내...." 어린 아들과 아내. 나는 얼굴도 안떠오르는 아버지의 얼굴을 어림잡으려 애쓰다 그렇게 밤을 새웠나보다. 어느새 창밖은 환하게 밝아 있었다. 아 래 층에 내려가보니, 어머니가 아침을 차리고 계셨다. 유난히도 많은 반 찬을 차려놓으시고도 연신 무언가를 끓이고 굽고 계셨다. "얘야, 이 어미가 밤새 잠을 설쳤단다. 아 글쎄, 내가 말은 안했지만, 느이 아버지가 떠날때 너랑 내가 누워서 자는 걸 한참을 보다가 그렇게 밤에 떠났는데, 어제 밤에는 자꾸 네가 내 방에 들어와서 자꾸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 보지 않겠니. 물론 꿈에 말이다." 어머니는 내가 떠날 걸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하기야, 내가 말은 안했어도, 우주로 떠날 사람한테 정부에서 이런저런 연락을 보냈을 터이고, 눈이 어 두우셔서 tv는 못보시지만, 라디오에서라도 내 이름이 이미 나왔을 것이 다. "어머니, 저 떠납니다." 어머니는 갑자기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여셨다. "응. 알고 있다. 저기 달에 갔다 온다면서?" 달. 어머니는 달에 갔다가 안전히 돌아오는 걸로 알고 계신다. 센타리우 스로 간다고 설명을 드려야 하는 것일까. "아녜요. 어머니, 전... " 어머니가 돌아서서 국을 뜨고 계셨다.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갑니다." 그렇게, 어머니와 말을 한 나도 그렇게 놀라면서 나는 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청소년시절 부터 맹목적으로 동경해온 우주로 나가는 대신 에 켄타리우스보다 더 먼 곳, 아버지가 가 계신 과거 1930년대의 카자흐 로 가기로 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갑자기 과거로 떠나신 것 만큼이나 우여곡절 끝에 갖가지 정부기관을 설득해서 과거로 떠나게 되었다. 어짜 피 우주로 떠나는 청소년이 우글거리고 있는데 비해, 과거로의 여행은 세 간에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그 성패가 아직 불확실한 상황일테니, 기관 에서도 내심 '믿을만한 자원자'가 아쉬운 형편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생 환대책이 없는 임무에 자원할 사람은 오히려 기관에서 더 아쉬운 시점임 에 틀림 없었다. 다만, 내가 아버지를 찾아서 과거로 떠난다는 얘기는 전 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인정많은 정부라도 사사로운 인연을 위해 막대한 정부기금을 쓰려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마도 그 알 수 없는 운명만을 믿고 떠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보다 명확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가 그 곳에 계시지 않는가. 그리고 나 역시 아 버지가 찾아가신 그 낯선 곳의 낯선 사람들에게서 알 수 없는 고향을 느 끼고 있었다. 나는 역시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 이곳 1937년 10월의 중앙아시아는 뭔가 특별한 낯설음이 있었다. 아름다 운 풍광에도 불구하고 춥고 유배지같은 그런 낯설음이랄까. 넓고 삭막한 벌판으로는 바람이 횡하니 흘러다니고 있었고, 구름 낀 하늘은 뭔가 청회 색 필터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 이 곳은 낯선 벌판. 떠나기 전에 나는 정보국에 몇 가지를 부탁했었다. 우선, 나는 1937년을 요구했다. 그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다음으 로, 그 넓은 중앙아시아의 황무지 중에서 내가 갈 과거의 지리적 위치를 정해야 했다. 단서는 하나였다. 한국인이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1937년 중앙 아시아에 한국인이 있던 장소로 나를 보내달라고 그랬었다. 그 곳은 과거의 기록을 뒤져서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가 더 있었다. 아버지가 가지고 가려고 했던 그것, 1938년의 그 한국인 시간 여행자가 간절히 원했던 그것을 가지고 가야 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결국, 아버지 일기에 있었던 그 쪽 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할수 밖에없었다.. '한 달', '일만 킬로미터의 이동', '굶주림'.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곧 알 수 있었다. 그 시대에 중앙 아시아에 있던 한국인이 필요로한 것은 셀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로 가지고 갈 수 있는 짐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아뭏든, 나는 지금 상자하나를 들고 이 곳 과거로 왔다. 1937년 10월. 그 시간여행자가 편지를 썼던 시기, 그리고 아버지가 떠나신 1938년 2월보다 4 개월 앞선 시간. 1937년의 10월에는 아직 이곳 중앙 아시아인 카자흐 지방에는 한국인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나는 러시아어를 하나도 모른다. 하지만, 떠나오기 전에 철도역과 수용소의 위치를 외워두었다. 아버지가 시간여행을 떠나셨 던 그 때로 부터 20년이난 지난 지금의 기술은 보다 진보된 것이어서, 정 확한 장소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앞으로 4개월 후, 지 독한 불확정성 원리때문에 정착민이 있는 곳에서 어쩌면 수백 km나 떨 어진 사막에 도착하실지도 모른다. 난 아버지가 하시려던 일을 도와야 했고, 어머니가 계신 곳에서 그토록 멀리 떨어진 과거에서헤메고 계실 아버지도구해야 했다. 간신히 숨어서 찾아간 라스똘로헤 기차역은 스산한 어둠이 감돌고 있었 다. 기차역에는 갑자기 어둠속으로 엄청난 행렬의 기차가 꼬리를 물고 도 착하고 있었다. 오늘 밤새 거의 100여개의 허름한 객차가 연이어 몇 개의 기관차와 더불어 끝도 없이 들어올 것이다.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당해서 1달여를 짐승처럼 추위에 시달리며 1만여 킬로미터를 실려왔다는 18만명 의 한인들의 첫 수송기차가 이제 속속 도착하고 있는 것이다. 우울한 행 렬이었다. 고향 중강진에서 보던 것보다 더욱 냉혹하고 거친 눈발이 계속 해서 내리고 있었고, 검정에 찌들은 회색이 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꾸 역꾸역 끌려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틈으로 어렵지 않게 숨어들어갔다. 그리고, 끝 쪽 객차에서 짐 내리는 것을 도왔다. 한 젊은 아낙네가 어린 딸과 함께 짐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내가 돕겠습니다." 아낙네는 딸도 고맙단 말도 없이 무표정했다. 아니, 아낙네는 자세히 보 니, 아직도 울고 있었다. 도착 직전에 죽은 시아비의 시체였단다. 이들이 내가 과거로 와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말을타고 다니는 러시아 장 교들은 총을 들고 짐과 황인종들을 끌어내는 병사들을 계속 독려하고 있 었고, 한국인들은 봇짐을, 혹은 등짐을 짊어지고 애들을 놓치지 않느라 전념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기어이 죽은 시아비의 시체마저 러시아 군인 에게 뺐긴 아낙네를 거의 업어매다시피 해서 데리고 그 어린 딸과 함께, 순순히 순순히 정착촌으로 향했다. 무엇보다도 채찍은 맞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정착촌에 대한 정보는 과거로 오기전에 본 것과 거의 비슷했지만 조금 은 달랐다. 아주 형편없었다는 것은 맞았지만, 말들의 축사를 개조한 것 이란 점은미처 알지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러시아 사람들은 이곳에 도착한 한국인, 혹은 달리 말하면 고려인, 까레야스키. 즉 나의 동 포들이 그렇게도 미워하는 일본인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무 언가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학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의 생존에 필요 한 최소한의 그 무엇조차 제공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 들도 무언가를 요구하기는 했다. 바로 까레야스키들의 거주집단의 청결문 제였다. 전염병은 무서웠던 모양이다. 이 추운 겨울나라에서도 말이다. 나는 그 젊은 아낙과 어린딸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 아낙의 남편은 이 곳으로 강제이주 당하기 몇 달전에 어디론가 잡혀갔다고 했다. 그래서 그 어느 유난히도 더 추운날 저녁에 러시안 인들이 사는 거리까지 나가서 밤새 일을 해주곤 옥수수 3개를 얻어와서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선생님, 전 제 남편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들에 의해서 총살당했을 겁니다." 내가 꽤나 냉정하게 잘라말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그렇게 끌려간 한인 들의 지도자는 그렇게 죽었다. 그러나아낙은 의외로담담하게 이렇게 말 했다. 한마디 화조차 내지 않고. "그럴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남편의 시체를 부등켜 안기전까지는 기다려 야 합니다. 전 구식 여자랍니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몸뚱아리가 탐나서 청혼을 한게 아니듯, 그녀도 날 불한당 취급을 하진 않았다. 다만 아낙은 자신의 처지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을 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 쪽의 남편 되는 것은 내 포기하리다. 하지만, 당신 딸은 내가 키우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잠자리도 같이하지 않는 여자의 딸을 나는 열심히 키웠다. 단 몇 달이라도 얼어죽지 않게 키워야 했다. 구걸을 해서라도. 이 곳에 도착한 지도 근 4개월이 다 되고 있었다. 그 추운 겨울동안 수많 은 사람들이 얼어죽었고, 그 때 마다 나는 내가 살던 시대에서 내가 고작 보잘것 없는 상자하나 분량밖에 들고 오지 못한것이 미칠듯이 가슴아팠 다. 내가 살던 시대의 기술의 한계였던 것이다. 추위에 떠는 동포들에게 는 한 상자 남짓의 구급약이나 식량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는 아 버지와 결과적으로 나까지 이곳으로 부른 그 시간여행자를 찾아보려 했 다. 그러나, 아무리한인들을 뒤져보아도 미래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사 람은 없었다. 난 행동을 하기로 했다. 곧 아버지도 이 곳 시간대로 불안 정한 시간여행 기술로 도착을 할 터이니 아버지도 찾아나서야 한다. 그래 서 난 내가 가지고온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은 볍씨들을 꺼내서 한인들에 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러시아에서 나누어주는 볍씨들은 모두 썩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농사는 실패하여 3분의 1 이상의 한인들 이 굶어 죽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 시간여행자가 애타게 미래에 요 청했던 것은 한 상자의볍씨였으리라. 아니, 어쩌면 최소한의 관심이었을 지도. 난, 내가 고심해서 가져온 볍씨들이 역사와 시간의 법칙 같은 그런 것을 벗어나서 우리를 얼마나 살릴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그것은 아 무도 모르는 것이다. 일단 볍씨를 나누어주고 나니, 나는 내가 할 수 있 는 오직 한가지 일을 해야했다. 근처의 가장 큰 도시로 가서 도서관을 지 켜야 하는 것이다. 곧 그 시간여행자가 도서관에 몰래 숨어들던지 해서 미래에 쪽지를 남기려 애를 쓸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서 힘을 합해야 한 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한것이다. 시내까지 까레야스키가 숨어들기는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째 굶어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도서관을 지키는 것도 현기증 나는 일이었다. 그 동안 사람과 길가는 개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면서 골목길의 모든 쓰레기통은 다 뒤져서 허기를 채웠다. 그러면서도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져도 그 시간여행자가 나타나지 않아 나는 극도로 초조해졌다. 그 때 갑자기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한 동양 인 하나가 도서관 문앞에서경비원들과 실강이를 벌이다가몰매를 맞고 있는게 아닌가. 아. 시간여행자. 틀림없는 그 사람이었다. 어찌해야 할 것 인가. 순간, 나는 그대로 두고 가버릴까 생각도 했다. 그러면 아버지가 미 래에서 그 쪽지를 보지도 않고, 나와 어머니를 두고 그 먼 곳으로 떠나가 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내가 피투성이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 는 이성을 잃고 그리로 달려갔다. 어쨌든 그를 구해야 했다. 그런데... 나 보다 한 발 앞서 달려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러시아 경비병들을 미친듯이 후려치고 있었다.나는 순간 멍한 얼굴로 그 옆에우두커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급박한 순간에 내가 왜 그리 멍하니 서있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사람의 얼굴은 그토 록 어머니가 원망하면서도 안방에다 몰래 숨겨놓으셨던 바로 아버지 사 진의 그 젊은 얼굴이었다. 아버지. 그러나, 그런 가족상봉의 감회에 젖을 여유도 없었다. 멀리서 군인들이 총을 들고 떼거지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아 버지는 시간여행자의 품 속에서 쪽지를 꺼내서 내게 건네고 있었다. "이..이보시오. 젊은이. 부탁하오. 제발, 저, 도서관에, 도서관에..." 타앙. 갑작스런 총소리. 아버지는 어처구니없게도 이 낯선 시간, 낯선 장소에서 쓰러지고 계셨다. 시간이 멈추는 듯했다. 쓰러지는 순간에 날 쳐다보는 그 눈길. 그 많은 의미중에 어린 아들인 나도 담겨있었을까. 나 는 도서관으로 뛰어들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 서고에나 뛰어들어서 그냥 흐느끼고 있었다. 멀 리군인들이 수색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참만에일어나 앉아종이쪽 지를 꺼내보았다. 종이쪽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 연해주에서 강제로 1달여 동안, 1만킬로미터를 이주당한 이들 한인들 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볍씨를 제발 보내주세요. 꼭 필요합니다. 1938년의 2월의 시간여행자가 2019년 이후의 그 어느날의 한국정부에게. > 나는 다가오는 군화소리를 들으며 근처의 목탄으로 독백처럼 전해지지 도 않을 이 한마디를 덧붙여서 쪽지를 근처의 커다란 책에다 끼워넣었다. '아버지. 나의아버지.' ..아버지는 너무도 먼 곳에 계셨다. 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