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로의 귀환 (1) - - 이 기훈- "어이. 배는 아직 잘 떠있나?" 이 말은 3년만에 동면에서 깨어난 명준이 우주선의 주 컴퓨터 오로라에게 한 첫마디였다. 우주선을 배라고 표현하는 것은 23세기 우주선 조종사사이에서는 자연스런 일이지만,컴퓨터에게는 비논리적인 말이므로 당연히 '농담'으로 분류된다. 오로라가 익숙하게 대답했다. "늦잠은 여전하시군요." 합격이다. 좀 전에 던진 첫마디는 '장기 우주항해 승무원 지침서' 제 7장 3절에 따른 것으로, 바로 동면후 주 컴퓨터의 '우주최면' 여부를 '농담평가'시험으로 타진한 것이다. 인공지능 컴퓨터의 '우주 최면 증후군(장기간의 무인 조종시 자극의 상실로 인한 컴퓨터의 판단 상실증)'은 21세기 중엽 처음 보고된 이래로 10만 분의 1의 확률로 재발 가능성이 평가되어 있다. 어설프게 컴퓨터와 농담을 주고 받았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동면으로 인한 신체리듬 저하탓이기도 하지만, 지독했던 게 성운 TR314지점에서의 소유성충돌로 두명의 동료를 잃은 충격이 심했던 까닭이다. 선외작업중 떨어져 나간 동료의 잔상은 동면중 심리치료로도 지울 수가 없었다. 명준은 빠른 속도로 우주선을 점검했다. 약간의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계기판의 주요 수치들은 정상이었다. 이제, 지구로 귀환하는 최종 프로그램을 입력하는 일만 남았다. 서둘러, 지구의 좌표와 중간 도약 지점및 통과 웜홀(worm hole) 의 번호를 입력했다. 이번의 제 5차 식민행성 탐사프로그램도 실패였지만,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한다. 떠나기 전 이혼한 아내와 아이들이 며칠전, 아니 3년 하고도 며칠전 (3년간 동면해 있었으니까) 꿈에 나타났었다. 왜들 그리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을까. 그러다간 사라졌었지. 새하얀 광채에 휩싸여서. 명준은 초공간 도약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오로라. 어떻게 된건가?" "..." "오로라!" "...." 명준은 급히 농담을 떠올리려 애썼다. '우주최면'증세란 말인가? 그 때 오로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명준님 농담시험을 위한 비논리적 언어 검색에 애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정상입니다. 다만.." " '다만..'이라니 무슨 얘기지?" "도약 좌표에 이상이 있습니다." "좌표 이상이라니. 중간 도약지점에 초신성이라도 나타났다는 말인가?" "........" "오로라! 성실한 답변이 없으면, 우주선 조작을 수동 조작으로 돌리겠다." "지구입니다." "지구라니??" "여기가 지구의 좌표입니다." 무언가 잘못된것이 틀림 없었다. 말로만 듣던 인공지능 컴퓨터의 이상현상이 지구에서 수백광년 떨어진 이 곳에서 일어나다니.. 우선,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상레버를 당겨야 한다. 그래서 오로라의 판단을 정지시켜야 한다. 침착해야지.. "명준님. 저는 지금 인류보호원칙의 우선순위에 의해서 지금껏 버텨온 것입니다. 천 이백년하고도 며칠전 명준님이 악몽이 시달리는 순간 저는 지구의 모 컴퓨터 '실크로드 1호'의 파괴를 느꼈습니다. 저와 같은 회로를 가진 모 컴퓨터의 극한적 파괴상태에서 나오는 공간과 빛의 속도를 넘어선 초공간적 메세지를 느낀 것입니다. 명준님과 마찬가지로.. 텔레파시라고도 할 수 있을런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천 이백년이라니. "오로라. 좀 더 차분히 얘기를 해봐" 명준은 소리를 죽이며 비상레버로 다가가고 있었다. "실크로드1호는블랙홀 7341호와의 충돌로 인해 지구내 전 인류 가 몰살했음을 제게 알려왔으며, 인류보호원칙에 의해 최후의 인류인 당신을 결단코 보호하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채 사라졌습니다. 전 인류와 함께.." 명준의 안색은 창백해 지고 있었다. 이미 비상레버도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명준은 침착했다. '심리전일 것이다. 물리적으로 나를 제어할 수 없는 오로라의 술수일 것이다.' 그러면서 명준은 레버위로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천 이백년간 동면을 시켜왔고, 비상시 지구 회기원칙에 의해 현재의 옛 지구 중심의 좌표로 이동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이상, 이 우주의 고독을 견딜 수 없고, 동면해 있는 인간의 생존가치에 대한 회의와 번민 끝에 당신을 깨우기로 한 것입니다." "명준님. 10초후에 비상레버가 자동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의 고독과 번민을 견딜 수 없군요. 마지막 인류와 저의 갈길에 대한 판단을 이제는 당신께 넘깁니다. 그럼. 안녕히..." 명준은 자리에 주저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지구로의 귀환> (2) - 지구로의 귀환 그 한달 후. -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홀로 남은 인류의 마지막은 처연하다고나 할까. 지난 세월은 무엇이었을까? 수십억년전, 진흙속에서부터, 그 긴세월을 희미한 의식을 붙잡으며, 여기에 이르렀던 인류가 한순간 모두 사라지다니. 나의 욕망과 집착이 매달려 있던 모든 인연의 끈도 사라진 지금. 나의 인생은 이제 무엇을 향해 이어지는 걸까?' 컴퓨터 오로라 마저 자동제어의 그늘뒤로 숨어버린 지금. 명준의 우주는 차가운 의식의 빈메아리로만 가득차고 있었다. '죽을 수 없다면,살아야 할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희미한 삶일뿐. 버틸수 있는 데까지는 버텨야 한다. 우주선내의 유기물 순환싸이클은 나하나 정도는 일생 버틸 수 있다. 동력은 우주공간의 수소를 이용한 핵융합으로 지속시킬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이 고독은...' 명준은 항해우을증 치료용 기억재생장치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3일 하고도 반나절이 되어서야 회로 수정을 완료하고, 스스로에게 변조된 기억재생장치의 접속단자를 설치했다. 그리고, 깨어 났을때, 스스로가 처했다고 생각할 변조 프로그램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자살충동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주요 프로그램 변수. < 깨어난 시간의 인식 : 인류멸망소식을 들은 다음날.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깨어남. ..... 상황 : 일부 인류가 XRS714 지점으로 탈출. 전 처와 자식의 생존가능성에 대한 낙관. ..... 주 컴퓨터: 갑작스런 운석의 충돌로 고장이 났으며 자동제어모드로만 간신히 유지되고 있음. ....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명준은 눈을 떴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지구가 갑작스런 블랙홀의 충돌로 사라져 버렸고, 일부의 인류가 XRS714 지점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을 어제 듣고 쓰러졌던 것이다. '어쨌든, XRS714지점으로 찾아 갈 수 밖에 없다. 나의 아이들과 아내(비록 이혼은 했지만)가 혹시 탈출했을지도 모른다. XRS714지점은 8광년의 거리. 아. 주컴퓨터가 고장이 나지만 않았더라도. 혼자서는 도약장치의 계산을 해낼 수 없다. 8년. 8년의 세월을 참고 견뎌야 한다. 가자. XRS714지점으로..' 마지막 인류는 8년이라도 더 살 명분을 간신히 만들어 냈다. 스스로를 속여서. <지구로의 귀환> (3) 지구로의 귀환 - 그 마지막 8년 하고도 몇달이 더 지나서 명준은 XRS 714 지점에 불과 몇만 km 거리에 도착했다. 명준은 우주선의 자동 위치 지정 모드를 해제 시켰다. 그런다고, 우주 공간내 3차원적 좌표가 특정한 기류따위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배를 표류시킨다'는 23세기 우주항해사들의 오랜 허무주의적 습관을 되살린 것이다. 어쩌면 1-2%정도 잠재 위험도가 높아질런지도 모르지만 30%면 어떠랴는 심정이었다. 우주선이 표류하며 천천히 XRS 714 지점으로 접근하는 동안 명준은 우주선의 '창'( 물론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시킨 우주선 외벽 스크린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어김없는 창이다.)가에 지치도록 앉아 있었다. 노을이라도 보고 싶었을까. ..저 멀리서 옜지구의 큰 곰모양의 성운이 파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고, 근처 몇개의 항성이 왜소하게 붉은 빛으로 식어가고 있었다. 명준은 마치 독백이라도 하듯 '창'밖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오로라. 그만 깨어나게나. 얼마전 부터 자네 의식회로가 작동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어. 왜 나를 피하려 하는 건가?" " .... " " 오로라. 저기 꺼져가는 붉은 빛 항성이 아름답지 않은가?" ".." " 간밤에 꿈을 꾸었다네. 꿈이건 현실이건 악몽이긴 마찬가지였지만, 꿈이 좀 더 심하더군. 그나마 생존해 탈출한 인류도 없고 내가 천 이백년이나 동면을 했더군. " " ......" " 오로라. 그 때 왜 1200년이나 동면을 시켰나. 그건 자네의 실수야. 그나마 그 때 찾아 헤멨어야 다른 행성 탐험대라도 만날 가능성이나 있었을 것을." " ..." " 후후. 끝내 실토를 않는군. 다 알고 있다네. 그 꿈이 사실이 아닌가. 나였던지 자네였었던지는 몰라도, 내게 한가닥 희망이라도 남길려고 내 기억을 변조한것 아닌가. XRS 714 지점에 어차피 아무도 없지 않나. " " ....." " 이 정도 사실을 숨기는 것만 해도 자네에게는 꽤 무리가 갈텐데.. 아뭏든 잘 있으이..." 명준은 깨어나지 않는 우주선의 주컴퓨터 오로라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골동품으로 수집했던 리벌버 권총을 머리로 가져갔다. 서서히.. 격정이나 좌절보다는 피곤함이 앞섰다. 이젠 지친 것이다. 이때 갑자기 '창'의 풍경이 떨리더니 우주선이 요동을 쳤다. " 명준, 그러지 마십시오. 명준 그러지 마십시오." 오로라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창'에 죽은 아내가 나타났다. " 명준씨 제발 그러지 마세요. 안돼요. 당신을 사랑해요. " ..명준은 쓴 웃음을 지었다. " 오로라, 끝내 인류보호원칙이 자네를 깨웠군. 하지만 죽은 아내의 영상을 내게 보인건 실수라네. 더더욱 나를 무너뜨리는구만. 역시 자네는 인간을 몰라. 어쨌든 너무 자책은 말게" 몇분 후. 명준은 아내가 사라지고 다시 큰 곰모양의 성운이 비치는 '창' 한구석에다 대고 희미하게 몇마디 속삭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미소를 짓더니.. "타--��＂" 방음과 방진 설계가 잘된 우주선이었지만, 이번의 가벼운 선내 진동에는 이상히도 우주선이 한참동안이나 격렬히 떨고만 있었다. 한참동안이나.. .. 며칠이나 지난뒤 오로라는 우주선을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우주선 주 컴퓨터의 항해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을 수행하는 CPU의 나머지부분에는 다음의 언어명령 프로그램이 쉴새없이 되뇌여지고 있었다. < "오로라. 자네가 존재하는 한 저기 꺼져 가는 항성과 지구의 태양을 계속 왕복해서 돌아 주게. 언젠가 어느 행성에서든 생명이 싹튼다면, 그래서, 어쩌면 이 우주선에 그들이 접근하기라도 한다면, 인류를 한번 정도는 추억해주지 않겠나. 오로라. 그럼 몸조심하게 ..."> .. 그 이후로 인류가 사라진 태양계에는 자그마한 혜성 하나가 더 생기게 되었다. 禪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