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르는 강물처럼 > 이기훈 허허. 참 세월이 덧없구만. 노인은 최신식으로 지어진 압록대교 위의 난간에 앉아서 무릎 위에 놓 인 책을 뒤적이면서 생각에 빠졌다. 저녁 햇살이 힘겹게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노인은 21세 기 후반까지도 끈질기게, 종이로 책을 만들어 팔던 출판사 <종이와 지성>사의 식자공이었다. 그 런데, 바로 어제 평생을 다니던 <종이와 지성>사가 폐업을 선언한 것이었다. " 범람하는 전자책{1)과 통신신문(2)의 홍수 속에서도 종이로 책을 만들어 인류의 가장 고귀한 유물 을 지켜오신 여러분. 본사는 그 오래된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악화된 경영난으로 인해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잠시 폐업을 하게 되었으니..." 노인은 자신과 동갑인 사장이 고뇌에 차서 직원들에게 얘기를 하던 모습을 잊을수 없었다. '잠 시' 폐업하겠다는 그의 말을 믿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사장도, 노인도 이젠 시대의 빠른 흐름 에 적응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든 것이었다. 거대한 시대의 조류를 뒤돌릴 수는 없는 패잔병 꼴이 된 노인은 유난히 쓸쓸한 정년을 맞고서 관광이라고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야.....야호..." 다리 중간에서는 젊은이들이 번지점프를 즐기고, 아래로는 제트 수상스키를 타느라 정신들이 없 었다. 그런데, 저 멀리 다리 난간에 노인의 시선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40대의 사내 하나가 난간에 아 슬하슬하게 걸터앉아서 아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노인은 드는 생각이 없지 않아, 서둘러, 그러나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보게, 요즘 세상이 참 덧 없구려. 그렇지 않소?" 엉겁결에 말을 걸어놓고 관찰을 하니, 고생을 꽤나 한듯한 중년의 나이였다. 사내는 노인을 보더 니, 의외로 사람이 그리웠던지 술술 자신의 얘기를 털어놨다. "전 말입니다. 최근에 실직을 했어요. 저는 원래 전문 번역가였습니다. 5개국어에 능통했거든요. 그런데, 좀 일을 해서 집 칸이라도 장만하려니, 글쎄, 17개국어의 자동통역 및 번역시스템(3)이 개 발되어서 온 나라에 쫘악 깔리지 뭡니까. 퇴직금도 제대로 못받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통역회사 에서 쫓겨났습니다. 어이 없더구만요. 그래서 실의에 차서 헤매다가 극장 매표소에서 한 몇달 취 직했었죠. 그런데, 아 글쎄. 이번에는 전국의 극장에 무인판매기가 등장하더군요. 자식들은 배를 굶고 아내는 울고.. " "참 운도 없었구만. 그래서 어떻게 했소?" "어떡하겠습니까. 이번엔 공사판으로 나갔죠. 좀 힘은 들었지만, 모래도 나르고, 시멘트도 섞고 그 럭저럭 할만하더군요. 그런데, 허허. 이번에도 역시 두 달도 못가서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공법이 도입되었네 어쩌네 하면서 공사판 자체가 없어져버렸으니.. 모든 건축물을 미리 만들어진 부품을 조립만 해서 짓기로 했다더군요. 아무래도 전 이 시대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든 것 같습니다." 노인은 그만 그 소리를 듣고 껄껄하고 소리내서 웃었다. 세상의 빠른 조류에 뒤처진 것이 자기 만이 아니었다는 안도감도 들었고, 무엇보다도 자기보다는 수십년이나 젊은 중년의 사내가 탄식 을 섞어 내뱉은 '이 시대에 적응하기엔 너무 나이가 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은 영락없이 자신이 아까 속으로 되뇌인 소리가 아닌가. 아뭏든, 노인은 중년의 사내를 좀 달래기도 하고, "이런 고얀 놈, 새파랗게 젊은 것이 그렇다고 다리위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해?"라고 고함도 쳐가면서 설득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런 저 런 얘기를 하면서 마치 노인과 그 아들처럼 오손도손 다리를 걸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두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 저 쪽편 다리 한 끝에 이번에는 20세 남 짓의 청년이 난간위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서서 아래를 쳐다보고 있는게 아닌가. 처음에는 청년이 무슨 번지점프라도 혼자 할려나 했는데, 밧줄도 없이 그냥 서있는 것이었다. 노인과 사내 둘은 약 속이나 한듯이 눈빛을 교환하고 어슬렁거리면서 그러나 속은 초조하게 접근을 해갔다. 노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에헴, 이보게 청년, 실연이라도 당했나?" 사뭇 진지한 표정의 청년이 힐끗 보더니,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뇨. 상관마십쇼." 사내가 보니 마치 집에 있는 자신의 아들같았다. 중년의 사내는 마치 아들 달래듯이 따스한 표정 으로 말을 붙였다. 그랬더니, 이 청년도 성큼 돌아서서는 신세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 컴퓨터 프로그래머였어요. 오락게임도 만들고, 기업 회계처리 프로그래밍도 하고 그랬어요. 한때는 뛰어난 실력으로 천재소리도 들었죠." "그랬는데?" 사내가 뭔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젠 저는 어디에도 발 붙일 데가 없어요. 이제 웬만한 프로그램은 인간의 도움 없이 컴퓨터 스 스로 만들어내죠, 게다가 오락게임은 5, 6세도 안된 애들이 가상현실 장치(4)를 써서 훨씬 빨리 그 리고 훌륭하게 만들어내죠. 전 아무래도 이 시대에 적응하기엔 너무 나이가 든 것 같아요." 청년의 얘기를 듣던 노인과 사내는 갑자기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적응하기엔 너 무 나이가 든 것 같다'라는 대사를 갓 스물도 안넘어보이는 떠거머리 청년이 천역덕스럽게 내뱉 는 모습이란. 청년은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웃 음이 비웃음이라기보다는 뭔가 따스한 공감 쪽에 가까운 것을 느꼈는지, 청년도 어느새 싱글거리 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세 사람은 할아버지와 아들과 손자 처럼 나란히 서서, 최첨단으로 된 인간미 없는 다리 위를 오손도손 얘기를 나누며 걸어갔다. 21세기는 다리 아래에 흐르는 강물처럼 그들이 적 응하기에는 너무도 빨리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셋이 민속촌에 가서 구식 막거리 한잔씩 걸치고 서로 다독거릴 만큼의 여유가 없는 것도 실은 아니었다. 세 사람은 어느새 각자 즐기던 나름의 '흘러간 옛노래'를 3중창처럼 젓가락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부르고 있었고, 멀리 지평선 쪽 에서부터 푸근한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사람 모두에게도 내일 아침은 좀 더 환하게 밝아올 듯 했다. (1) 전자책: 컴퓨터 화면상에서 화려한 그래픽과 음악을 곁들여가며 빠른 검색및 감상할 수 있도 록 된 책. 요즘 벌써, 수십권 분량의 각종 백과사전을 단 한장의 CD에 담아서 널리 판매하기도 한다. (2) 통신신문: 21세기에는 각종 기사가 전화선이나 광케이블을 통해 각 가정으로 전자책의 형태로 전해 시시각각 전달될 것이다. 현재도 제한된 형태의 통신신문이 각 통신망에서 실시되고 있다. (3) 자동통역 및 번역시스템 : 현재는 제한된 형태의 문서통역 및 음성통역 시스템이 개발되어 있 다. 휴대용 컴퓨터가 고성능화 된다면, sf 영화에나 나옴직한 기계에 의한 동시통역이 가능해질 것이다. (4) 가상현실 장치: 전자장비로 인간의 오감을 확대시켜서 마치 현실과 전혀 다른 새로운 공간을 느끼게 하는 장치. 현재, 아이들의 오락장비는 물론, 육안으로 보기 어려운 부위의 첨단수술 등에 사용되고 있고, 장차 보다 난이도가 어려운 형태의 컴퓨터 프로그램 제작에도 응용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