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텔레비 제사 > 이기훈 '정말, 그이를 닦달한 보람이 있지 뭐야. 빙하 위에서 제트스키를 타는 이 스릴이란...' 손여사는 마냥 흐뭇했다. 지난달 내내 남편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북부 캐나다로 겨울 휴가를 온 것이다. 해발 수천미터의 산에서 만 년설을 타고 미끄러지는 제트스키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 속도감 도 짜릿했지만, 리프트도 없이 가뿐히 날아서 산봉우리로 되돌아가 는 그 맛! 정말 개마고원의 그 북적대는 스키장에 비할 바가 아니 었다. 그런데, 손여사가 마냥 흥에 겨워 콧노래라도 부르려는 찰나, 난데 없이 호출소리가 들렸다. "따르르릉" 아휴, 짜증나. 모처럼의 휴가에 누가 방해를 놓는 거야? 손여사는 툴툴거리면서 스키를 자동모드로 놓고, 손목시계에 붙은 수신기를 켰다. 발신지는 핀란드였다. "동서, 아무래도 아버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것 같어." 호출한 사람은 핀란드로 놀러간 박여사, 이른바 김씨 집안 맞며느리 였다.잔뜩 껴입은 차림새가 막 북극점 관광을 다녀온 모양이다. 태 양의 흑점활동 탓인지 갑자기 액정화면이 조금 흔들렸다. "아니 형님, 아버님이 왜요?" "글쎄, 내일이 돌아가신 어머님 제사 아냐, 근데 연락도 없으시구." 그러고보니 그랬다. 작년만해도 일주일 전부터 몇 번씩이나 구식 전 화를 걸어 제삿날을 챙기고, 또 챙기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올해 는 으레 알아서 연락하시겠지 하고 느긋하던 며느리들의 허를 찌르 신 것이다. "정말, 그러네, 형님이 좀 연락해보지 그러셨어요. 화가 나셨나?" "아냐, 동서, 아무래도 연락이 안돼. 한반도 전체에 폭설이 내렸다 는데, 무슨 일이나 생기셨음 어떡하지?" 손여사는 서둘러 옆에 따라오던 남편의 스키를 불러세우고,한국으 로 연락을 했다. 다행히 한반도로 가는 모든 통신망은 아무 이상 이 없었다. 하지만, 위성통신, 광케이블망 가릴 것없이 온갖 방법 으로 시도를 해봐도 시아버님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추운 겨울 에, 특히, 시어머니 제사를 앞두고는 멀리 나다니실 아버님이 아닌 데. 무슨 사고라도 난게 아닐까. 다급해진 손여사는 지역 리스센터 연락해 가장 비싼 '인편 연락 써비스'까지 동원해보았다. 하지만, 시아버님 댁은 문이 굳게 닫혀 있을뿐 인기척이 없다는 것이었다. 경찰이나 소방당국은 갑작스런 기상이변으로 내린 폭설 탓에 개인 의 실종조사를 할 여유가 없었다. 사실, 손목시계에 부착된 건강진 단기로 전체 국민의 건강상태까지 확인되는 마당에, 일부러 숨지 않 은 마당에야 굳이 경찰이 나설 까닭도 없었다. 아뭏든,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손여사의 남편 김상국씨는 이성 을 잃고 말았다. 벌써, 털썩 주저 앉아서 '아버어니임' 하고 통곡을 하고 있는 남편을 옆에두고 손여사도 아득하기만 했다. 에구, 이 일 을 어쩌누. 노부모 혼자 두고, 자식들이 핀란드니, 캐나다니 놀러다 니다가 이 꼴이 되었으니, 뒷수습은 어찌 할 꼬. 간신히 정신을 차 리고 손여사는 핀란드의 형님 내외와 뉴질랜드에서 온천을 즐기던 시누이에게 연락해서 급히 귀국을 서둘렀다. 급한대로 잡아탄 화물 수송 콩코드기는 성층권까지 치솟아 급히 아시아로 향했다. 영종도 아시아 콩코드 스테이션에 도착하니, 형님 내외와 시누이가 벌써 와 있었다. 김상국씨와 큰 형님은 급히 헬기 를 수소문하느라 돌아다녔고, 두 며느리는 이런 저런 걱정에 발을 구르고 있었다. "아유, 형님, 이러다 아버님 돌아가신 거면 이 창피를 어쩌죠? 우리 애아빠 승진에도 지장이 있을텐데.." "그러게 말야, 참 아버님도 하필 이 때.." 시아버지가 계신 중강진까지는 헬기를 타고 갔다. 김씨 일가가 탄 헬기는 비상추진 장치를 모두 가동해야 했고, 온통 새하얀 땅 위를 분간하느라 쉴새없이 인공위성과 교신을 해야 했다. 간신히 지상에 착륙한 김씨 일가는 허겁지겁 문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막 문을 뜯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순간, 아버님이 기다리셨다는 듯이 멀 쩡한 모습으로 문을 턱 여시는게 아닌가. 손여사는 일순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 휴가를 망친 아쉬움과 불만이 슬그머니 피어올랐다. 그런 사정은 시누이도 마찬가지였는지 방안에 들어가 자 마자 냉큼 뾰족한 소리를 내뱉었다. "아니, 아버지, 이게 웬일이에요? 저희 골탕먹일려구 그러신 거죠?" "....." 그런데, 주섬주섬 손수 제삿상을 차리던 아버님이 허리를 펴시더니, 방안에 들어선 모두를 쳐다보시며 조용히 이러시는 거였다. "그러면 이눔들아, 올해도 텔레비 갖다놓고 제사드릴라 그랬느냐. 응, 그랬어? 불효막심한 것들." 순간, 샐쭉했던 며느리들과, 두 아들, 그리고 딸까지 너나할 것 없 이 모두 꿀먹은 벙어리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사실 몇 년째 바 쁘단 핑계로 자식들 모두가 화상통신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던가. 이윽고, 모두들 돌아가신 어머님의 영정에 다소곳이 절을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김노인의 얼굴엔 반가움과 눈물이 가득 어려 있었다. ' 임자, 애들이 왔어. 정말이래두. 텔레비가 아녀.' 禪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