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간의 나그네 -

                                  이기훈

 먼 여행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도 성운위에 나란히 떠있는
 세 개의 항성을 찾아내진 못했다. 옅은 수소의 미풍이 근처의 조그만
 블랙홀로 불어가고 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사내는 멀리 게성운을
 바라다 보았다. 거대한 초신성이 스러져 간 잔해가 저리 아름다운 화석을
 이루다니. 나의 고향 시간대와 공간이 저 틈에 산산히 부서져 한 줌의
 암흑성운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사내는 기나긴 시간과 공간의 헤메임에
 이제 지쳐서 수소의 연한 미풍에 의식을 싣고는 내버려두었다. 드넓은
 우주에 퍼져서 헤매이던 그의 의식이 옅은 수소의 미풍에 실려서 작은
 블랙홀 TX32로 빨려들어갔다.

 ..하나의 연약한 항성계. 눈앞의 식어가는 희미한 항성은 안간힘을 다해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중력의 파도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우연이었을까, 우주를 떠도는 수많은 필연의 한 가닥일까. 사내는 지나가는
 소박한 얼음덩어리에 동승해서 생각에 잠겼다. 왜, 모든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다니면서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혜성은 태양에 다가갈수록
 힘겹게 녹아내리면서 꼬리를 드리우고 있었다. 사내는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아래의 작은 행성으로 내려갔다. 긴 성운도 없었고, 그 위로
 나란히 떠있는 그 아름답던 세 개의 태양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의 기억
 한구석에 아련히 남아 있는 그 곳 고향의 행성은 결국에는 더이상 시간을
 거스를 수 없던 '큰 폭발' 이전의 시간대에나 존재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뭏든 사내는 너무나도 유한하고 희미한 존재가 꿈틀거리는 조그만
 행성으로 의식을 움직여 갔다. 그리고 어렵사리 시간과 공간의 질을
 유한속에 가두어 조그만 행성에 스스로를 속박시켜 갔다.

 그가 부딪쳐간 극지의 대기는  태양의 자기풍이 마침 부딪쳐와 다채로운
 색감을 내고 있었다. 털모자를 쓴 건장한 사내와 조그만 아이가 다정히
 얘기를 하고 있었다.

 " 허어. 30년만에 보는 진푸른색 오로라구만. 카니스멘이 오늘 이땅을
 스쳐지나가는가 보네."

 " 카니스멘이 누구죠?"

 " 얘야. 그 분은 '신의 나그네'란다. 온 세상이 멸망을 끊임없이 앞으로
 되돌리시는 분이지. "

 "아빠. 그러면 저 혜성이 '신의 나그네'인가요?"

 "아니란다. 혜성은 그 분의 눈썰매일뿐이란다. 네 아버지의 아버지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 먼 할아버님 때부터 모두들 기다려온 바로 그
 분이지. 춥고 굶주린 에스키모를 구원하신단다."

 둘은 얘기를 끝내더니 길을 재촉하며 나란히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는
 듯 했다. 아름다운 조화였다. 시이퍼트 은하 NGC 1275 에서 만났던
 암석생물들의 그 낮고 긴 합창만큼이나 다정하고 긴 노래였다.
 사내는 오랫만에 조금 웃어보았다.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작은 시공의
 인연이라도 이 얼마만이던가. 사내는 그들이 가는 먼 저편에 자그마한
 화산을 만들어서 오래 타게 만들었다. 그리고 작은 풀들이 많이 자라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기뻐했다. 카니스멘.

 카니스멘은 여전히 계속되는 백야와 청색편이가 유난히 심한 오로라를
 등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조금씩 날아올랐다.
 스치고 지나가는 곳에 산맥도 바다도 사막도 있었다. 그리고,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시간축을 잠시 벗어났다. 얼마쯤이나 과거로 갔을까.
 이 행성이 한 수백번 정도는 저 태양을 거꾸로 돌았을까.
 아뭏든 아래의 조그만 장소로 내려갔다.

 어두운 실내에는 내려앉은 먼지만큼이나 시간을 붙잡아 둔 표정들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계속해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누구일까. 그
 누구인데 이들을 그리도 애타게 만들었을까.

  "주님께 바라옵건데, 당신의 병든 양떼를 돌보소서.
  버림받은 그들의 불신이 이제 창궐하여 온 나라가 병에 들끓고 있나이다.
  부디 약속하신 이땅에 다시 왕림하시어 세상의 종말을 막으소서.."

 '수도사'라 불리우는 늙은이가 이리 읖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부르는
 자의 형상은 그 늙은이 만큼이나 초췌해보였다.
 카니스멘은 시내로 나가 분노에 사로잡힌 병균을 달래었다. 그러나
 카니스멘의 공허는 더욱 커졌다. 가는 곳 마다 누군가를 불러대고 찾지만
 결국 그의 자리는 아닌것이다. 세개의 태양이 나란히 떠있는 우주의 바다.
 그 곳. 그의 고향에 속하는 시간과 공간을 찾기 전까지 그의 권능이나
 자유로움은 공허함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카니스멘은 그 공허함의 끝자락에
 잠시 시간축을 놓아버리고, 시공의 소용돌이가 주는 현기증을 즐겼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그새 이 조그만 항성계가 사라져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밀려오는 공허를 견딜수가 없었다.

 .. 갑작스레, 잠이 깨었다. 큰 파충류때가 무리지어 극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대지가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들의
 다급함과 초조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들의 유한성에 깃들어 있는
 긴장과 슬픔이 부럽기도 했다. 높은, 아주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조용히 구체성을 띈 이 우주변방의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반갑네."

 카니스멘은 깜짝 놀랐다. 한 존재가 곁에 있었던 것이다. 긴 목을 가진
 파충류새였다. 아니 그런 형태의 또다른 초월적인 존재였다. 시간과 공간을
 떠도는 또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자네..도 떠돌고 있군."

 "허허. 그랬었지. 하지만 이제 정착했다네."
 그 큰 파충류새가 눈빛으로 웃음섞인 말을 전해왔다.

 "정착이라면? 자네의 고향이 깃든 시공의 자리를 찾았단 말인가?"
 카니스멘이 허겁지겁 물었다. 자신내부의 공허가 긴장으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이 찾아오고 있었다.

 "저기 저들 보이나? 저 공룡들 말일세. 거기 뒤쪽에 처져서 조그맣게 떠서
 따라가는 어린 새가 보이지? 그게 나일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면서
 이리 커버렸지만, 저 새가 분명히 나라네."

 "아. 그렇군. 자네가 저기 있군. 저 구체성을 띈 유한존재의
 아름다움이란.." 카니스멘은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하하. 너무 부러워 말게. 이제 곧 엄청나게 큰 운석이 저기 떨어진다네.
 바로 저 어린 파충류의 바로 위에 말일세."

 그 말을 마치고 파충류새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카니스멘도 이 행성에 널리
 퍼진 공룡들의 운명을 생각하고, 높은 산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모양만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새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인간의 형상으로 보이는 군. 포유류말일세. 아마,우리 파충류가
 다 없어진 한참후에 태어나서 '그 자리'에 있게 된 모양이군.
 거기에 가보았나?"

 " '그 자리'가 무슨 말이지? " 카니스멘은 순간 세 개의 태양과 긴 성운의
  환상이 다시 스쳐가는 걸 느꼈다.

 "아마, 자네도 '그 자리'에 있었을 걸세. 커다란 운석이나 혜성이
 떨어졌던지, 아니면 거기에 비길만한 엄청난 에너지가 폭발할때 그 한가운데
 있었겠지. 그래서 그리 떠돌아다니는 거 아닌가."

 파충류새는 곧 떨어질 운석을 기다리듯 하늘을 쳐다보며 덧붙였다.

 "어서 그리로 가게. 그리고 이제 더시간과 공간을 떠돌아다니지 말고 자네
 종족의 마지막을 지켜주게. 나도 한 때는 전 우주끝을 떠다녔지만, 이제는
 이 조그만 시간과 공간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다네. 종말이 오기 바로전의 이
 시간대의 고향에서 말일세."

 카니스멘은 큰 블랙홀 근처의 가파른 중력의 격차에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시간축을 급히 기울였다. 너무 서두른 탓에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나
 침착히 시간의 줄기에 남은 미세한 단절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리로 갔다.

 .. 덜컹거리는 석탄 열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나간 뒤로 혜성의
 꼬리처럼 철길이 길게 뿌려졌다. 커다란 바다 구석의 작은 반도의
 남쪽해안에 카니스멘은 와있었다. 그리고 열차는 철길의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동안에도 자꾸만 북으로 향해갔다. 위에서 보는 바다와 뭍에서
 보는 바다는 너무도 달랐다. 행성의 중력 경계점에서 보는 바다는 자그마한
 푸른색이었는데, 뭍으로 내려와서 흔들리는 석탄열차 뒷칸에서 문을
 열어놓고 보는 바다는 뭔가 아득하고 희뿌연 그 무언가가 있었다. 더구나
 태양이 뒤쪽으로 숨어버린 밤의 시간대에서는 더욱 그랬다. 기억을
 더듬었다. 공허속에 아물거리던 기억이 한층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여기는 '동해'였다. 아. 저기 저 바닷가에 해안선을 따라 조그마한 어촌이
 보였다. 카니스멘은 서둘러 의식을 일으켜 날아올랐다. 아래 바닷가에는
 고기잡이 그물이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집집마다의 부엌에서는 된장국냄새가
 피어올랐다. 저 쪽 편 불꺼진 학교의 운동장에는 친구들과 낯동안
 뛰어놀던 미끄럼틀과 시소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카니스멘은 아니 어촌의
 작은 소년이던 '명준'은 해변 한 구석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어두운 밤바다를 보고 있었다. 아니, 어둡지 않았다. 어두운 바다의 저 먼
 수평선가에 오징어 잡이 배 세척이 나란히 떠서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마치 과학시간에 배운 성운위에 태양이 환하게 세 개나 떠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카니스멘이자 명준은 어린 자신과 이 어촌마을위에 떨어질 엄청난
 에너지의 핵폭탄을, 연이어 다가올 인류의 멸망을 기다리면서 앉아있었다.
 수평선가의 오징어잡이배의 등불은 성운처럼 깔린 바다와 하늘을
 여느때보다 한층 더 환하게 밝히고 있었고, 정지된 시간축을 부여잡고
 버티는 연약한 포유류는 한없이 그대로 앉아서 인류의 마지막을 되새기고만
 있었다.


  禪犬..